24 양인란(楊仁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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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칠곡읍
효부(孝婦) 양인란(楊仁蘭) 48세

가난한 농가(農家)의 5남매(男妹)의 막내딸로 태어나, 그의 나이 19세(歲)때 이연정씨(李然正氏))와 결혼(結婚)한 양인란(楊仁蘭) 여사(女史)는, 천수답(天水畓) 400평(坪)의 조그만 농토(農土)로 노령(老齡)의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살아야만 했는데, 신혼초(新婚初)부터 밥을 먹는 날보다 국수를 먹는 날이 더 많을 정도(程度)로, 그의 생활(生活)은 가난으로 점철(點綴)되어 있었다. 

어느 덧 그에게도 5남매(男妹)를 슬하(膝下)에 두게 되어, 이제 정말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가난은 더욱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男便)마저 하찮은 직장(職場)이기는 했으나 실직(失職)이 되는 바람에, 오직 하나뿐인 생명선(生命線)이었던 천수답(天水畓) 김매기를 비롯하여, 닥치는 대로 일하여 연명(延命)을 해 갔다. 

비록 양여사(揚女史)는 눈만 뜨면 가난에 쫒기는 신세(新歲)이긴 했지만, 자녀(子女)들에 대(對)한 교육열(敎育熱)이 남달리 높아 그 동안 5남매(男妹) 모두를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진학(進學)시켜 배움의 길을 틔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78세(歲)의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었다.

그러자 양여사(揚女史)는 평소(平素)에도 시모(媤母)님에게 효성(孝誠)을 다하여 봉양(奉養)해 오던 터인지라, 용변처리(用便處理)에서부터 식사(食事) 시중에 이르기까지 더욱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간호(看護)하면서 그의 건강(健康)을 정성(精誠)들여 보살펴 드렸다. 

특(特)히 남의 집 잔치에 초대(招待)되어 맛있는 음식(飮食)을 대접(待接)받을 때는, 시모(媤母)님 생각으로 음식(飮食)을 먹지 않고 집에 가져 와 시모(媤母)님께 드리기도 했고, 또한 사과밭 날품팔이를 다닐 때도 간식(間食)으로 얻은 사과를 먹지 않고 시모(媤母)님께 갖다 바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오로지 시모(媤母)님 생각뿐이었다. 

어느 날은 점심(點心)을 먹지 않고 일하다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같이 일하고 있던 주위(周圍) 사람들이 

"시모(媤母)님 생각하지 말고 점심(點心)이나 간식(間食)이 나오면 나오는 쪽쪽 먹도록 해요." 

이와 같이 걱정을 하면서 그에게 타일렀지만 양여사(揚女史)의 대답은, 

"나야 굶어도 괜찮지만 불쌍한 시(媤)어머님만은.............." 

하면서, 다음날 도 또 그 다음 날도 맛있는 점심(點心)이나 간식(間食)이 나오면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곤 하였다. 

비단 그는 시모(媤母)님에게뿐 아니라 마을 노인(老人)들에게도, 그가 시모(媤母)님을 대(對)하듯 존경(尊敬)하는 마음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다. 

'정직(正直), 성실(誠實), 효도(孝道)' 바로 이 가훈(家訓)을 자녀(子女)들에게 깊이 심어 주고 있는 양여사(揚女史)는, 오늘도 일터에서 오로지 시모(媤母)님의 건강회복(健康恢復)만을 간절히 빌고 있는 지성(至誠)스러운 효부(孝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