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김수남(金水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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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덕군 지품면
효부(孝婦) 김수남(金水男) 28세

김수남(金水男) 여사(女史)는 맏아들 대신(代身) 차남(次男)인 그의 남편(男便)이, 가장(家長) 구실을 해야 하는 둘째 며느리로 시집가서 가난과 더불어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게 되었다. 

더우기 시부모(媤父母)님은 두 분이 다 병석(病席)에 계셨고, 조그마한 농토(農土)로는 식구(食口)들이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형편(形便)이어서, 그가 행상(行商)으로 가계(家計)를 돕기 시작(始作)하였다. 

하루에도 수십리(數十里)길을 누비면서 행상(行商)길에 나선다는 것이 용이(容易)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든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가계(加計)를 돕는 한편 시부모(媤父母)님 병간호(病看護)에도 최선(最善)을 다해 봉양(奉養)하였다. 

그런데 불행(不幸)히도 4년 전(年前)에 시모(媤母)님은 별세(別世)하고 이제 시부(媤父)님만을 모시게 됐지만, 지병(持病)인 중풍기(中風氣)가 마침내 더욱 악화(惡化)되어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행상(行商)으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조그만 농토(農土)까지 마련한 김여사(金女史)의 다음 소망(所望)은, 오직 시부(媤父)님의 조속(早速)한 건강회복(健康恢復)뿐이었다. 

이제 85세(勢)의 고령(高齡)에 눈까지 먼 데다 기동(起動)마저 못하게 되니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만 했고, 하루 세끼 식사(食事)도 그의 손으로 일일이 떠먹여 드려야만 하는 등 그의 손길은 쉴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 변기(便器)에 대소변(大小便)을 보는 일보다 이부자리에 방뇨(放尿)하는 일이 더 많아, 빨래도 날마다 숱하게 많았지만, 그는 단(單) 한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시부(媤父)님을 시봉(侍奉)하였다. 

직업상(職業上) 남편(男便)은 객지생활(客地生活)을 해야 했기에, 그 녀(女) 혼자서 병(病)든 시부(媤父)님의 시봉(侍奉)을 들면서, 3남매(男妹)를 키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 녀(女)가 마련한 농토(農土)에도 땀을 쏟아야만 먹고 살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環境)속에서도 남달리 애향심(愛鄕心)이 두터운 김여사(金女史)는, 마을 부녀회원(婦女會員)으로 활약(活躍)하면서 남다른 열의(熱意)를 보이고 있는데, 그는 절미운동(節米運動), 저축운동 (貯蓄運動), 폐품수집운동(廢品蒐集運動)에 앞장서서 부녀회(婦女會)의 이름도 빛내고 있다. 

또한 경로효친사상(敬老孝親思想)에 있어서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자식(子息)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이 본능적(本能的)이며 무조건(無條件)의 것이라면, 부모(父母)에 대한 자식(子息)의 공경(恭敬)과 효성(孝誠) 역시 본능적(本能的)이며 무조건(無條件)의 것이어야 한다."는 뜻의 내용(內容)으로, 부녀회원(婦女會員)들에게 효(孝)의 의미(意味)를 설득(說得)시키기도 했다. 

바로 그 예(例)가 9년(年)이란 긴 세월(歲月)을 불평(不平) 한 마디 없이 오직 시부(媤父)님을 위해 병간호(病看護)를 해 온 그의 아름다운 행실(行實)에서 엿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부(媤父)님이 신음(呻吟)하시다가 잠이 들었을 땐, 일절(一切) 시부(媤父)님 방 근처(近處)에 얼씬도 못 하도록 자녀(子女)들에게 타이르는 그의 세심(細心)한 효심(孝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김여사(金女史)의 뜨거운 효성(孝誠)은 놀랍기만 했다. 

"아무리 정성(精誠)을 다한다 해도 끝이 없는 것이 효도(孝道)이다. 또한 부모(父母) 생전(生前)에 하지 않는다면 다시 고쳐 하지 못하는 것이 효도(孝道)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지닌 효(孝)의 진실(眞實)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