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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경(林浩慶) 여사(女史)는 그가 18세(歲) 때 결혼(結婚)하였는데, 시집을 와 보니 시조모(媤祖母)님과 불구(不具)의 시모(媤母)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조모(媤祖母)님은 이농증(耳聾症)으로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東問西答)하기가 일쑤였고, 또한 시모(媤母)님은 다리의 통증(痛症)으로 인(因)하여 변소(便所) 출입(出入)도 가까스로 하는 불구자(不具者)였다.
원래(元來) 천성(天性)이 단정(端正)하고 온순(溫順)한 그는 웃어른들의 괴로움을 자신(自身)의 고통(苦痛)으로 생각하고, 그가 지닌 모든 효성(孝誠)을 다 바쳐 두 분을 극진(極盡)히 모셨다.
그러던 어느 날, 군(軍)에 입대(入隊)한 남편(男便)이 용전(勇戰) 분투(奮鬪)하다가 전사(戰死)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비보(悲報)에 접(接)하게 됨으로써 이 가정(家庭)에는 곡성(哭聲)이 터지게 됐다.
21세(歲)때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임여사(林女史)는, 이와 같은 비극(悲劇)이 자신(自身)의 부덕(不德)과 박복(薄福)탓이라고 자위(自慰)하면서, 시가(媤家)를 위해 평생(平生)을 같이 할 것을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모(媤母)님께 굳게 맹세(盟誓)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후, 다리만 불편(不便)했던 시모(媤母)님이 갑작스럽게 완전(完全)히 움직이지도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시조모(媤祖母)님도 노환(老患)으로 눕게 되어 임여사(林女史)는 두 환자(患者)를 번갈아가면서 간호(看護)에 정성(精誠)을 쏟는 한편,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을 임여사(林女史)가 손수 처리(處理)하였다.
그러면서 농사(農事)일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약초(藥草)를 채취(採取)하기 위하여 깊은 산골짝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앉은뱅이 고생(苦生)하는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몸부림쳤던 임여사(林女史)는, 그의 간절(懇切)한 희구(希求)를 신(神)에게 빌어 보기로 하고, 그날부터 3년(年)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單) 하루도 빠짐없이,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한밤중 즉(卽) 자정(子正) 때마다 꼭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祈禱)를 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시모(媤母)님은 그야말로 기적적(奇蹟的)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때의 그 기쁨, 그 감격(感激)으로 며느리와 시모(媤母)는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다.
임여사(林女史)의 이와 같은 지성(至誠)이 이 마을과 저 마을로 울려 퍼지자, 이 현대판(現代版) 심청(沈淸)을 구경(求景)하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이 많을 만큼, 그의 뜨거운 효심(孝心)은 이 고장의 자랑으로 끝없는 미담(美談)의 꽃을 피웠다.
임여사(林女史)의 정성(精誠)어린 기도(祈禱)가 기적(奇蹟)으로 나타나 건강(健康)을 되찾게 된 시모(媤母)님은, 하루 30리(里)길도 아무런 탈도 없이 왕래(往來)할 정도로 정상인(正常人)의 건강(健康)으로 되돌아왔다.
지금은 오래 전(前)에 맞아들인 양자(養子)와 더불어 행복(幸福)하게 살고 있는 임여사(林女史), 그의 시모(媤母)님은 지금도 그날의 기적(奇蹟)을 회상(回想)하면서 며느리의 손목을 꼭 잡고,
"네가 바로 하느님이다." 하시면서 기쁨의 눈물로 얼굴을 적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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