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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在娶)로 시집온 박순금(朴順金) 여사(女史)는, 소작농(小作農)으로 찌들어지게 가난한 시가(媤家)의 참상(參相)을 보다못해 시집 오기가 바쁘게 일터로 뛰어들었다.
박여사(朴女史)는 위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면서 품팔이와 갈포짜기, 칡껍질벗기기, 삯바느질 등 각종(各種) 부업(副業)으로 생계(生計)를 이어왔으며, 일터에서 그는 '억척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열심(熱心)히 일을 하였다.
마침내 박여사(朴女史)는 시집온 지 8년(年)만에 시댁(媤宅)의 간절한 소망(所望)이던 논 800여평(餘坪)과 밭 600여평(餘坪)을 사들이는 기쁨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로써 소작농(小作農)에서 자작농(自作農)으로 전환(轉換)하는 감격(感激)의 계기(契機)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기쁨이 오죽 컸으면 그의 남편(男便)이 무릎을 끓고 박여사(朴女史)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큰절까지 했을까.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暫時)뿐으로 이 가정(家庭)에 암운(暗雲)이 덮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다름아니라, 병명(病名)을 알 길이 없는 중병(重病)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이 함께 병석(病席)에 눕게 된 것이다.
두 시(媤)어른을 모시고 이 병원(病院)저 병원(病院) 등을 찾아가 보았지만 노환(老患)이라고만 말할 뿐 뚜렷한 병명(病名)을 찾지는 못했다.
인동초(忍冬草)와 분꽃 그리고, 산초나무뿌리와 먹동 등의 약초(藥草)가 좋다고 해서 상시(常時) 복용(服用)토록 했으나, 그것도 별효험(別效驗)을 보지 못한 채 대소변(大小便)도 가리지 못할 만큼 병세(病勢)는 더욱 악화(惡化)되어 갔다.
따라서 박여사(朴女史)는, 시부(媤父)님은 시부(媤父)님대로 그리고 시모(媤母)님은 시모(媤母)님대로 하루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용변처리(用便處理)를 해야만 했고, 번갈아가면서 목욕(沐浴)도 시켜야만 했다.
또한 더럽혀진 옷과 이불, 요 등을 세탁(洗濯)하기 위해 빨래터에서 진종일 살아야만 했다.
이와 같은 궂은 일이 5년여(年餘)에 걸쳐 매일(每日)같이 되풀이되었지만, 그는 단(單) 한마디의 불평불만(不平不滿)도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숭배(祖先崇拜)에 대해서도 남달리 성의(誠意)가 많은 박여사(朴女史)는, 9대(代) 봉사(奉祀)에도 그의 정성(精誠)을 다 쏟아 동리(洞里)에서도 사표(師表)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제사(祭祀) 때에는 온 식구(食口) 모두가 목욕(沐浴)을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례(祭禮)를 지내도록 배려(配慮)하고 있다.
어려운 생활(生活) 속에서도 남달리 자녀교육(子女敎育)에 정열(情熱)을 쏟고 있는 그는, 고등학교(高等學校)에 1명(名), 중학교(中學校)에 1명(名), 그리고 국민학교(國民學校) 3명(名), 이와 같이 5명(名)의 자녀(子女) 모두를 알차게 교육(敎育)시키고 있다.
한편 그의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다고 해서 면정화위원회(面淨化委員會)로부터 위로격려품(慰勞激勵品)을 받기도 한 박여사(朴女史)는 항상(恒常) '참을 인(忍)'자(字)를 머리 속에 그리며 사는 것이 그가 지닌 생활신조(生活信條)라고 하였다.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입고 싶은 것도 입지 않고,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참아가면서 악착스럽게 자작농(自作農)의 꿈을 이룩한 박여사(朴女史), 비단 그는 생활(生活)에만 '억척이'가 아니라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極盡)히 섬기고 남편(男便)을 정성(精誠)껏 받드는 일에도 누구 못지않은 '억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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