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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태(洪永胎)여사(女史)는 팔순(八旬) 고령(高齡)이 넘은 노시부모(老媤父母)님과 4명(名)의 시(媤)동생 등 9명(名)의 식구(食口)를 책임(責任)져야 하는 여가장(女家長)으로서, 그의 하루 일과(一課)가 낮에는 농사(農事)일, 그리고 밤에는 품삯일과 가마니 짜기로 어려운 생계(生計)를 이어가는 그런 처지(處地)의 농촌(農村) 주부(主婦)이다.
그는 "또순이 아줌마"라는 별명(別名)까지 들을 만큼 개미처럼 부지런했으며, 또한 "구두쇠 아줌마"라는 또 다른 별명(別名)이 붙은 정도(程度)로, 홍여사(洪女史)의 근면성(勤勉性)과 저축(貯蓄)에 대한 의욕(意慾)은 남달리 강(强)하기만 하였다.
1971년(年)부터 1981년(年) 사이에 그의 힘으로 시(媤)누이 4명(名)을 모두 출가(出嫁)시킨 것만 보더라도 그의 성품(性品)을 알 수 있으리라.
시부모(媤父母)님에 대한 공경심(恭敬心)도 대단했는데, 특(特)히 1978년(年)에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자, 그는 만사(萬事)를 제쳐놓고 중풍(中風)에 좋다는 한약(漢藥)과 신약(新藥)을 구(求)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어느 여름에는 며칠을 두고 약(藥)만을 구(求)하러 다니다가 농사(農事) 적기(適期)를 놓쳐 한 해 농사(農事)를 망친 일이 있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깊은 산(山)을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다음 날 저녁 무렵에만 가까스로 귀가(歸家)한 일도 있을 만큼 그의 효성(孝誠)은 놀랍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용변처리(用便處理)에서부터 목욕(沐浴)시켜드리기, 이 밖에 매일(每日) 계속(繼續)되는 환자(患者)의 의복세탁(衣服洗濯)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효성(孝誠)이 뒤따랐다.
그런 고된 일손 속에서도 홍여사(洪女史)는 언제나 미소(微笑)를 지으면서 시모(媤母)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했으며, 특(特)히 외출(外出)에서 돌아올 때는 환자(患者)가 좋아하는 음식(飮食)을 꼭 사다 드리기도 했고, 또한 바깥 세상(世上)에서 듣고 보고 온 새로운 소식(消息)들을 재미있고 구수하게 들려 주는 등, 그의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는 치밀(緻密)하고 지성(至誠)스럽기만 하였다.
비단 홍여사(洪女史)는 가정(家庭)에서만 충실(忠實)한 것이 아니라 동리(洞里)에서도 모범여성(模範女性)으로 귀감(龜鑑)이 되고 있는데, 예(例)를 들면 그 자신(自身) 눈코 뜰 새 없이 시간(時間)에 쫒기면서도, 일손이 부족(不足)한 농가(農家)를 찾아가서 이웃 돕기의 미덕(美德)을 솔선수범(率先垂範)하기도 했고, 절미(節米), 저축운동(貯蓄運動)과 폐품수집(廢品蒐集)도 앞장서서 시범(示範)을 보이기도 하였다.
옛부터 부모(父母)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덕(德)을 거스른다 하였고, 또한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지 아니하고 남을 공경(恭敬)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禮)를 거스른다고 했지만, 홍여사(洪女史)는 가정(家庭) 안에서나 가정(家庭) 밖에서나 웃어른에 대(對)해서는 예의범절(禮儀凡節)을 무조건(無條件)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효심(孝心)도 골고루 똑같이 나누어 줄 정도(程度)로, 그의 경로사상(敬老思想)은 본을 받고도 남는 일이었다는 것이 동민(洞民)들의 공통(共通)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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