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임정자(林正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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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1981년 4월 11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주시 하망동
효부(孝婦) 임정자(林正子) 31세

임정자(林正子)여사(女史)는 그의 나이 18세(歲) 때 전처(前妻)의 아들 2명(名)을 가진 김원배씨(金元培氏)와 결혼(結婚)하였는데, 그가 걸어온 인생역정(人生歷程)은 문자(文字)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그의 남편(男便)은 벽돌을 만드는 블럭 공(工)이었는데, 임여사(林女史)는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가면서도 전실(前室)의 두 아들을 친모(親母) 이상(以上)으로 정(情)을 쏟아 키워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自身)도 가계(家計)를 돕기 위해 품팔이, 행상(行商), 식모(食母)살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행복(幸福)을 꾸려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남편(男便)이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져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는 불운(不運)을 겪는 바람에, 생활(生活)은 더욱 어두운 수령으로 빠져 들어갔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한편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고 또 한편으로 자녀(子女)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하는 일들은 참으로 감당(堪當)하기 어려웠지만, 임여사(林女史)는 모든 것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으로 이겨나갔다. 

그러한 임여사(林女史)에게 또 다른 시련(試鍊)이 닥쳤다.  

그것은 1975년(年)부터 발작(發作)하기 시작한 시모(媤母)님의 노망기(老妄氣)였다.

때로는 방(房)안에서 수시(隨時)로 용변(用便)을 보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로 횡설수설(橫說竪說)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성냥을 갖고 다니면서 남의 집에 방화(放火)를 하는 등 시모(媤母)님의 노망기(老妄氣)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이번에는 시부(媤父)님마저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져, 한 집안에 중환자(重患者)가 3명(名)이라는 기구(崎嶇)한 운명(運命)에 처(處)하게 됐다.

따라서 임여사(林女史)는 그야말로 하루에 단 10분(分)도 쉴 사이가 없을 만큼 세 사람의 중환자(重患者)만을 위해 간호(看護)해야만 했는데, 그의 힘겨운 뒷바라지는 눈물겹기만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가 끝났는가 하면, 이번에는 또 남편(男便), 그 다음에는 또 시모(媤母)님의 차례로 그의 손을 기계(機械)라 하더라도 지탱 못할 정도(程度)였는데, 특(特)히 시모(媤母)님이 간혹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됐을 때는 중환자(重患者) 두 사람을 집에 놔 두고 이리저리 찾아 헤매야 하는 말 못할 고충(苦衷)으로 남몰래 눈물지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노망기(老妄氣)의 시모(媤母)님이 발병(發病)한 지 6년 후(年後)인 1981년(年)에 지극(至極)한 구환(救患)의 보람도 없이 유명(幽明)을 달리했는데, 시모(媤母)님 병(病)구완 6년(年) 세월(歲月)에 꽃다운 청춘(靑春)을 다 바쳤다고 한다. 

지금도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에 대한 간병(看病)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쏟고 있는 임여사(林女史)는, 특(特)히 국민투표(國民投票)나 선거(選擧)를 할 때는 두 분의 환자(患者)를 번갈아 업고 투표소(投票所)에 나갈 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의 효성(孝誠)에 깊은 감명(感銘)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제 그의 두 아들도 운전기사(運轉技士)와 기능공(技能工)으로 각기(各其) 취업(就業)을 했으니 이들의 장래(將來)는 보장(保障)됐지만, 식물인간(植物人間)처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남편(男便)과 사경(死境)만을 헤매고 있는 시부(媤父)님이, 기적적(奇蹟的)으로 건강(健康)을 되찾지 못하는 한(限) 그의 손길도 쉴 날이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