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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규(李東奎君) 어릴 때부터 '산양(山羊)'이라는 별명(別名)이 붙을 정도로 온순(溫順)하고 성실(誠實)했는데, 국민학교(國民學校) 3학년(學年) 때부터 가사(家事)에 도움을 줄 만큼 소녀시절(少女時節)부터 그는 효자(孝子) 노릇을 하면서 자라났다.
예(例)를 들면 학교(學校) 공부(工夫)가 끝나기가 바쁘게 집으로 달려와서, 아버지가 하는 농사(農事)일을 발벗고 나서서 도왔는가 하면, 어머니의 잔심부름과 어린 동생 돌보기도 모두 그가 해낸 하루의 일과(日課)였다.
뿐만 아니라, 부모(父母)님이 병석(病席)에 눕기라도 하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기도 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누구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서 미음을 끊이는 등 어린이답지 않게 효자(孝子) 구실을 하였다.
국민학교(國民學校)와 중학교(中學校)를 부모(父母)님이 곁에서 마친 그는, 단신(單身)으로 대구(大邱)에 나와 공업고교(工業高校)에 입학(入學)한 후 자취생활(自炊生活)을 시작했는데, 이런 이군(李君)은 하숙(下宿)집에서도 모범학생(模範學生)으로 인정(認定)받을 만큼 주변(周邊)사람들의 칭찬(稱讚)이 자자했는데, 학교(學校)에서도 부지런하고 성실(誠實)한 면(面)을 보여 교사(敎師)들과 급우(級友)들로부터도 사랑을 듬뿍 한 몸에 받았다.
공고(工高)를 우수(優秀)한 성적(成績)으로 졸업(卒業)한 이군(李君)은, 1979년 3월(月) 경상북도(慶尙北道) 학생과학관(學生科學館)에서 실시(實施)한 전기(電氣) 기사(技士) 채용시험(採用試驗)에 합격(合格)한 후, 그가 원(願)했던 직장(職場)에 무난(無難)히 취업(就業)할 정도로 그의 끈질긴 집념(執念)은 오늘의 보람이 되어 현실(現實)로 나타났다.
그 후(後) 고향(故鄕)에서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하고 2년(年)동안 집에서 놀고 있는 남(男)동생을 대구(大邱)로 데리고 와 중학교(中學校)에 입학(入學)시켜 지금까지 줄곧 그가 학비(學費)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를 본 향리(鄕里)에서는 부모(父母)의 도움 없이 동생의 학비(學費)를 대 주고 있는 이군(李君)의 갸륵한 마음씨에 아낌없는 찬사(讚辭)를 보내 주고 있으며, 누구보다 그의 부모(父母)는 아들의 효행(孝行)과 우애(友愛)에 감동(感動)하여 남몰래 눈물짓기도 하였다.
이군(李君)은 직장(職場)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공부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는 굳은 의지(意志)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였다.
직장(職場)에서 퇴근(退勤)하면 딴 곳에 눈길을 팔지 않고 곧장 집으로 직행(直行)을 해서 오직 책과 씨름하는 것이 습관(習慣)이 될 만큼 이군(李君)은 억척스런 공부벌레였다.
그의 노력(努力)은 헛되지 않아, `1981년(年) 3월(月)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공대(工大) 야간부(夜間部)에 입학(入學)하는 영광(榮光)을 맞게 되었으며, 따라서 낮에는 직장(職場)에서 그리고 밤에는 대학(大學)에서 그의 열정(熱情)을 쏟고 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바로 이 명언(名言)을 가슴에 꼭 새기고, 낮이나 밤이나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면서 구슬땀을 흘려 일하고 있다는 이효자(李孝子), 그의 앞길에는 밝은 태양(太陽)만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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