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영자(金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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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남 청도군 청도읍
열부(烈婦) 김영자(金榮子) 46세

김영자(金榮子) 여사(女史)는 어릴 때부터 성품(性品)이 단정(端正)하여 행동(行動)이 성실(誠實)하고 의젓하여 주위(周圍)의 칭찬을 받곤 하였다. 

김여사(金女史)가 혼인식(婚姻式)을 올리기 전날, 친정(親庭)어머니는 "아내가 비록 남편(男便)과 동등(同等)하다고는 하지만 남편(男便)은 곧 아내의 하늘이니라, 그러므로 남편(男便)을 항상 예(禮)로써 공경(恭敬)하여 섬겨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김여사(金女史)는 친정(親庭)어머니의 당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결혼 후(結婚後)에도 성품(性品)과 행동(行動)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努力)하였다. 

비록 시가(媤家)의 살림이 빈한(貧寒)하여 10평(坪)짜리 슬레이트 주택(住宅)에 600평(坪)도 못 되는 농토(農土)밖에 없었지만, 언제나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남편(男便)과 시모(媤母)님을 받들며 단락(團樂)한 가정(家庭)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던 중 평소 건강(健康)이 좋지 않던 남편(男便)이 폐결핵(肺結核)으로 눕게 되면서부터 10여년(餘年)의 긴 간병생활(看病生活)이 이어졌다. 

이에 김여사(金女史)는 남편(男便)이 하던 바깥 일과 집안 일을 혼자 몸으로 감당(堪當)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處地)를 당하게 되었다. 

자작농토(自作農土)를 혼자서 가꾸는 한편 날품팔이와 잡역(雜役)까지 하면서, 5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돌보고,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해야 하는 바쁜 생활(生活)속에서도, 그는 오직 남편(男便)의 쾌유(快遊)를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빈곤(貧困)한 생계(生計) 속에서도 좋은 약(藥)이라면 힘 닿는 데까지 구(求)하여 목욕(服用)시키는가 하면, 심지어(甚至於) 개를 손수 잡아 보신(補身)시킨 일만도 60여(餘)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던가, 김여사(金女史)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로 마침내 남편(男便)은 건강(健康)을 되찾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의 자녀교육(子女敎育)에 대한 정성(精誠)또한 대단하여, 580평(坪)의 답작(畓作)도 혼자 손으로 해내고, 틈이 나는 대로 남의 집 품팔이와 잡역(雜役) 등 중노동(重勞動)을 불사(不辭)하고 해내면서 뒷바라지에 헌신(獻身)하였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열성(熱誠)이 결실(結實)을 보아 2명(名)의 자녀(子女)가 대학(大學)을 졸업(卒業)했고, 1명(名)이 대학(大學)에 재학 중(在學中)이며, 남은 자녀(子女)들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에 대하여도 20여년 간(餘年間)을 정성(精誠)을 다해 봉양(奉養)했다. 

시모(媤母)님이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누워 있을 때는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보살피며 정성(精誠)을 쏟았다. 

남편(男便)과 간병(看病)과 노시모(老媤母)님의 봉양(奉養)을 비롯하여 날품팔이와 중노동(重勞動)으로 자식(子息)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 온 그를 두고, 인근(隣近) 주민(住民)들은 "김여사(金女史)야 말로 뼈를 깎는 고통(苦痛)을 참아 오면서 자녀(子女)들을 키워 왔고, 남편(男便)과 시모(媤母)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도 살이 찢기는 아픔을 참아 왔다."고 칭찬(稱讚)하였다. 

이처럼 그가 걸어온 일생(一生)은, 고난(苦難) 속에서 아름다운 부덕(婦德)을 한결같이 실천(實踐)한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