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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李貞洵)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부(農夫)인 권오수씨(權五壽氏)와 결혼(結婚)하여, 팔순(八旬)의 시조모(媤祖母)님과 육순(六旬)의 시부(媤父)님을 모시며 가산(家産)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24세(歲)때, 30세(歲)의 남편(男便)이 척추마비(脊椎痲痺)로 전신(全身)이 불구(不具)가 되는 불운(不運)을 맞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여사(李女史)의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人生)고난(苦難)이 시작됐다.
한 때는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 내야 할 정도로 폐인(廢人)이 되어 버린 남편(男便)을, 외면(外面)하고 개가(改嫁)라도 했으면 마음까지 들기도 했으나, 그 때마다 늙으신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媤父)님, 그리고 전신불구(全身不具)인 남편(男便)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그의 뇌리(腦裡)에서 자리잡고 있어서, 나 혼자만의 행복(幸福)을 위하여 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 인간(人間)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어 의연(毅然)한 결심(決心)으로 남편(男便)의 간병(看病)에 정성(精誠)을 쏟았다.
남편(男便)의 간병(看病)과 시(媤)어른의 봉양(奉養), 그리고 가장(家長)으로서의 무거운 임무(任務)를 맡게 된 힘겨운 생활(生活)이 10여년(餘年) 동안 이어지는 사이, 구순(九旬)의 시조모(媤祖母)님은 노환(老患)으로 별세(別世)했지만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몸져 눕게 되는 중고(重苦)를 겪게 되었다.
따라서 이여사(李女史)의 손으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는 중환자(重患者)가 한 집안에 둘이 생긴 셈이었다.
더우기 그는 젊은 여인(女人)의 몸으로 네 식구(食口)의 생계(生計)까지 해결(解決)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정신적(精神的)으로나 육체적(肉體的)으로나 더없이 고달팠으나 조금도 낙담(落膽)하지 않고, 눈앞에 다가선 어려운 시련(試鍊)을 인내(忍耐)와 용기(勇氣)로 이겨나갔다.
인생 자체(自體)가 고행(苦行)이라고 자위(自慰)하면서, 매일(每日) 안방과 뒷방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두 분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기도 했고, 남편(男便)과 시부(媤父)님을 차례로 목욕(沐浴)시키고, 더러워진 이부자리를 번번이 세탁(洗濯)해야 했고, 의복(衣服)도 매일(每日)처럼 빨아서 갈아 입혀야 하는 등등의 눈물겨운 뒷바라지는 끝도 없이 계속(繼續)되었다.
그 위에 신경(神經)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남편(男便)의 간섭(干涉)과 잔소리에는 죽고 싶은 심정(心情)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상냥한 미소(微笑)로 이해(理解)를 시켰고, 또 밥상에 고기반찬 한 번 올리지 못하는 불효(不孝)를 시부(媤父)님께 이해(理解)시켜 드려야 했다.
이와 같은 간병생활(看病生活)이 이어진 지도 어언 20여년(餘年), 이제 이여사(李女史) 자신(自身)도 머리카락이 희긋희긋한 중노(中老)가 되어가지만 그의 간병(看病)의 정성(精誠)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남은 여생(餘生)도 두 분 곁에서 병(病)구완을 하면서 보내야 할 이여사(李女史)는, "인생(人生)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고달픈지 모르겠다."는 말 한 마디로, 그의 한(恨) 많은 인생(人生)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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