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自身)의 몸을 바다에 던진 심청(沈淸)이 효(孝)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듯이, 유계하(柳桂夏) 여사(女史) 또한 앞 못 보는 남편(男便)을 위해 때로는 지팡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등불이 되기도 하여 현대판(現代版) 심청(沈淸)이란 칭송을 받고 있다.
온순(溫順)하고 겸허(謙虛)한 성품(性品)을 태어나 자란 유여사(柳女史)가 권건양씨(權建陽氏)와 화촉(華燭)을 밝힌 것은, 유여사(柳女史)가 23세(歲) 되던 해였다.
남편(男便)인 박씨(朴氏)는 앞을 보지 못하는 관계로 전혀 생활능력(生活能力)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재산 (財産) 하나 제대로 물려받은 것도 없었다.
따라서 빈한(貧寒)한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유여사(柳女史)가 몸소 날품팔이나 막노동(勞動)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고, 밤이나 낮이나 손발이 닳도록 일한 품삯으로 생계(生計)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苦難)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앞 못 보는 남편(男便)을 온순(溫順)하고 정숙(貞淑)한 성품(性品)으로 아내로서의 정성(精誠)을 다 바쳐 받들었다.
일을 나갈 때면 집 안에 있는 남편(男便)이 불편(不便)하지 않도록 밥상을 일정한 자리에 차려 놓았으며 변기(便器)를 가까운 곳에 두어 용변(用便)에 불편(不便)이 없도록 조치(措置)해 두는 배려(配慮)를 잊지 않았다.
또 집에 돌아오면 무료(無聊)한 남편(男便)을 위해 바깥 소식(消息)을 들려 주었으며, 어떤 날은 옆 집에서 전(傳)해 들은 TV 연속극(連續劇)을 되풀이하여 구수하게 들려 주기도 하였다.
간혹 남편(男便)이 "당신(當身) 나하고 결혼(結婚)한 것 후회(後悔)하지 않소?"하고 묻기라도 하면 "당신(當身)께서 후회(後悔)하고 있는 모양이구려."하며 웃어 보이는 애정(愛情)을 표현(表現)하기도 했다.
이렇게 앞 못 보는 남편(男便)의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20여년간(餘年間)을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지성(至誠)으로 시중들어 왔다.
또한 그는 오랜 기간(期間)을 속병으로 누워 계시는 시모(媤母)님에 대한 병간호(病看護)도 지극(至極)하여 주위(周圍)의 칭송(稱頌)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유여사(柳女史)는 어느덧 2남(男) 4녀(女)의 어머니가 됐다.
유여사(柳女史)의 일과(日課)는 앞 못보는 남편(男便)의 시중에다 위로는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고 아래로는 6남매(男妹)를 뒷바라지 해야 하는 바쁘고 고된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그 큰 일을 거뜬히 해내었다.
특히 그 자신(自身)이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풀기 위해서 자녀교육(子女敎育)에 각별(恪別)히 신경(神經)을 쏟았다.
유여사(柳女史)는 자녀(子女)들에게 항상 "정직(正職)하게 살라."고 훈계(訓戒)하는 동시에, 자신(自身) 또한 이를 몸소 실천(實踐)함으로써 주위(周圍)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 이전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김옥자(金玉子) 25.05.16
- 다음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이정순(李貞洵) 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