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옥자(金玉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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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용궁면
효부(孝婦) 김옥자(金玉子) 36세

김옥자(金玉子) 여사(女史)의 남편(男便)인 강석규씨 (姜石奎氏) 5형제(兄弟) 중의 막내로 태어나, 물려받은 가산(家産)이라곤 200여평(餘坪)의 손바닥 만학 농토(農土)밖에 없었다. 

21세(歲)의 젊은 나이로 강씨(姜氏)와 결혼(結婚)한 김여사(金女史), 그를 반기는 것은 중풍환자(中風患者)로 기동(起動)이 불편(不便)한 시모(媤母)님뿐이었다. 

위로 형(兄) 넷이 있었지만, 모두 병석(病席)에 누운 노모(老母)를 모시기를 외면(外面)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여사(金女史)가 친(親)아들마저 기피하는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를 혼자 묵묵히 수행해 나가야만 했다.

하루에도 수 차례나 용변(用便)을 처리(處理)하는 것을 물론, 하루도 빠짐없이 세수(洗手)와 목욕(沐浴)을 시켜 드렸으며, 추(醜)한 옷은 한 번도 입혀 드리지 않고 깨끗이 세탁(洗濯)하여 갈아 입히고 몸치장도 해 드렸다. 

또한 방안에서 풍기는 악취(惡臭)를 없애기 위해, 방을 항상 청결(淸潔)하게 청소(淸掃)함으로써 시모(媤母)님의 기분(氣分)을 기쁘게 해 드렸다. 

그런데, 정작 김여사(金女史)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시모(媤母)님의 병간(病看)이 아니라,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고 주벽(酒癖)만 부리는 남편(男便)이었다. 

따라서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의 구환(救患)과 자녀(子女)들의 교육문제(敎育問題)등 목전(目前)에 산적(山積)한 과제(課題)를 해결(解決)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男子)로서도 하기 힘든 날품팔이와 막 노동(勞動)등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가려는 김여사(金女史)와는 달리 남편(男便)은 매일(每日) 술타령이었다. 

김여사(金女史)의 간곡(懇曲)한 애원(哀願)과 충고(忠告)는 늘 우이독경(牛耳讀經)에 불과(不過)하였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남편(男便)도 본연(本然)의 파세(婆勢)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으며 시모(媤母)님 구환(救患)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특히 80회(回) 시모(媤母)님 생신일(生辰日)에는, 어려운 가정형편(家庭形便)이면서도 정성(精誠)껏 음식(飮食)을 마련해서 마을 어른들과 함께 즐기도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를 하기도 했으며 학교(學校)에 다니는 자녀(子女)들에게는 도시락도 싸 주지 못할 정도의 빈한(貧寒)한 살림임에도, 시모(媤母)님 머리맡에는 언제나 파일과 간식(間食)을 마련해 놓았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은 널리 알려져, 1971년 8월(月)에 용궁경로회의(龍宮敬老會長)이 수여(授與)하는 효행상(孝行賞)을 위시해서, 1978년(年) 5월(月)에는 예천군수(醴泉郡守)의 '장(壯)"한 어머니 상(賞)'을 그리고 1980년(年)에는 유도회장(儒道會長)의 효행(孝行) 표창(表彰)을 받는 등 지금까지 3차(次)에 걸쳐 효행상(孝行賞)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극(至極)한 아내의 효성(孝誠)에 감화(感化)된 남편(男便)이, 마침내 술을 멀리하고 가사(家事)를 돌보는데 힘쓰게 되었으며, 3남(男) 1녀(女)의 자녀(子女)들도 어머니를 본받아 동리(洞里)에서 소문난 효자(孝子), 효녀(孝女)로 알려져 "효(孝)의 가족(家族)"이란 찬사(讚辭)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