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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자(李春子) 여사(女史)는 1959년(年)에 산골마을의 농가(農家)로 출가(出嫁)하여, 위로 시모(媤母)님과 아래로 4남(男) 1녀(女)의 자녀(子女)를 둔 집안의 가장(家長) 노릇을 해야만 했다.
남편(男便)인 김봉열씨(金鳳烈氏)와 사별(死別)하기 전(前)까지의 이여사(李女史)는, 단락(團樂)한 가정(家庭)의 주부역할(主婦役活)을 착실히 해 나가면서 소박(素朴)한 행복(幸福)을 가꾸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結婚) 10년(年)째 접어들던 해에 남편(男便) 김씨(金氏)가 갑자기 병석(病席)에 드러눕게 되었다.
몇 군데의 병원(病院)에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었다.
단순(單純)한 신경병(神經病)으로 알고 있었던 병(病)이, 발병(發病) 한지 5년(年)이 지나면서부터 문밖 출입(出入)도 할 수 없을 만큼 병(病)이 악화(惡化)되어, 7년간(年間)을 대소변(大小便)도 이여사(李女史)의 손을 빌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오히려 남편(男便)이 고통(苦痛)을 가슴 아파하면서 간병(看病)에 온갖 정성(精誠)을 기울였다.
이런 이여사(李女史)의 지극(至極)한 간병(看病)도 아랑곳 없이 남편(男便)은 12년(年)만에 세상(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35세(歲)의 젊은 여자(女子)의 몸으로 4남(男) 1녀(女)의 자녀(子女)와 노모(老母), 그리고 이 가정(家庭)의 생계(生計)를 홀로 책임(責任)지게 된 이여사(李女史)는, 자녀(子女)들만은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유산(遺産)받은 2000평(坪)으로 여장부(女丈夫)로서 농군(農軍)이 되어 농사(農事)에 전념(專念)하였다.
또한 6.25 사변(事變)때 두 아들을 잃고 마지막 남은 자식(子息)마저 오랜 병고(病苦)끝에 떠나보내고만 시모(媤母)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慰勞)하면서 봉양(奉養)에 최선(最善)을 다하였다.
다행히 시모(媤母)님의 건강(健康)은 그리 나쁜 편(便)이 나이어서 이여사(李女史)의 마음은 한결 평안(平安)하였으나, 건강(健康)할 때 건강(健康)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틈틈이 몸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어다 시모(媤母)님께 시탕복용(侍湯服用)케 하였다.
그 어머니에 그 자녀(子女)라고나 할까?
다섯 자녀(子女) 모두가 홀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조석(朝夕)으로 풀 베기를 해서 퇴비(堆肥) 만들기에 힘쓰는가 하면, 시간(時間)있을 때마다 논밭으로 나와 김매기와 피뽑기 등으로 이여사(李女史)의 노고(勞苦)를 덜어 주었다.
자녀(子女)들은 지금 대학교(大學校)에 2명(名), 고등학교(高等學校)에 1명(名), 중학교(中學校)와 국민학교(國民學校)에 각각 1명(名)씩 적(籍)을 두고 있으니, 이 모두가 이여사(李女史)의 노력(努力)의 결정(結晶)이라 하겠다.
지난 1981년(年) 10월(月)에 선산군수(善山郡守)로부터 '장(壯)한 어머니 상(賞)'을 받기도 한 이여사(李女史)는, 자녀(子女) 모두가 훌륭한 사회인(社會人)이 되어 주기를 간절(懇切)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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