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소병조(蘇秉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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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칠곡군 지천면
효자(孝子) 소병조(蘇秉祚) 42세

소병조씨(蘇秉祚氏)는 어린 시절(時節) 시골에서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나름대로 행복(幸福)한 가정(家庭)에서 자랐다. 

그런데 부친(父親)인 소영수옹(蘇永壽翁)이 병석(病席)에 눕게 된 것은 소씨(蘇氏)가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어린 학생(學生)의 몸으로 가장(家長)이란 힘겨운 역할(役割)을 담당해야 하는 그였지만, 산골짜기를 헤매어 약초(藥草)를 구(求)하기도 하면서 부친(父親)의 병간호(病看護)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고등학교(高等學校)를 졸업(卒業)한 후에는 기동(起動)이 불편(不便)한 부친(父親)을 옆에서 모시기 위하여 취직(就職)도 투기(投棄)하고 농사(農事)에 전념(專念)하였다. 

비록 병석(病席)에 누워 계시는 부친(父親)이지만, 소씨(蘇氏)는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부친(父親)과 의논(議論)하기를 잊지 않았으며, 가산(家産)의 관리권(管理權)이나 금전(金錢) 일절(一切)를 부친(父親)의 수중(手中)에 맡겨 두었다가 필요(必要)할 때, 다시 받아쓰는 번거러움을 감수(甘受)하면서도 부친(父親)을 즐겁게 하고 아울러 좌절감(挫折感)을 없애 드리기 위해 노력(努力)하였다. 

국민학교(國民學校) 5학년(學年) 때 즉 10세(歲)의 나이로 아버지의 병(病)을 간호(看護)하기 시작하여 30년(年)이 지난 지금까지, 언제나 부친(父親)의 곁에서 시봉(侍奉)들기에 바쁜 그였기에 관광(觀光)나들이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當然)한 일었지만, 그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부친(父親)의 면전(面前)에 임(臨)하였고, 외출(外出) 시(時)에는 출필고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소씨(蘇氏)는 자신(自身)의 행적(行績)을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대(時代)가 변(變)함에 따라 사회도의(社會道義)가 땅에 떨어지고 경애사상(敬愛思想)이 점차 쇠퇴(衰頹)하여 가는 현실(現實)을 개탄(慨嘆)하면서, 

"인친이위보(仁親以爲寶)라는 말은 인친(仁親)으로 보(寶)를 삼는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부모(父母)에게 효(孝)를 다하는 일은 인간(人間)에 있어서 보배이며 나라의 보배가 아니겠습니까?"하고, 

인근동민(隣近洞民)을 상대하여 경로사상(敬老思想)을 역설(力說)하였다. 

부친(父親)을 향(向)한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을 당연(當然)한 일로 받아들이고 조금도 자랑거리로는 삼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세간(世間)의 잘못된 생각을 개탄(慨嘆)하고 있는 그야말로 진정(眞正)한 효(孝)의 실천자(實踐者)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