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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국자(崔菊子) 여사(女史)는 두 다리를 모두 못쓰는 불구자(不具者)로 태어난 항상(恒常) 고민(苦悶)과 슬픔에 싸인 생활(生活)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나이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고아(孤兒)로 자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던 서른 여덟 살의 박희만씨(朴熙萬氏)와 결혼(結婚)을 했다.
동장(洞長)의 주체(主體)로 마음 회관(會館)에서 이루어진 혼례식(婚禮式)에서 이들 부부(夫婦)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단간 셋방을 얻어 신방(新房)을 차린 그들은 불구(不具)와 고아(孤兒)의 쓰라림을 참고 견디며, 어떻게 해서라도 열심히 노력(努力)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새로운 삶을 출발(出發)하였다.
다음 날부터 남편(男便)인 박씨(朴氏)는 남의 집 머슴살이로, 최여사(崔女史)는 방 안에 앉아 홀치기와 삯바느질로 열심히 땀을 흘린 결과(結果), 결혼(結婚) 3년(年)째 되던 해에 그들은 30만(萬)원이라는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비록 움막같은 집이지만 내 집 마련의 기쁨도 맛 볼 수 있어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이었다.
더욱 기쁜 일은 남편(男便)이 어린 시절(時節)에 헤어졌던 어머님과 재회(再會)하게 된 일이었다.
이미 71세(歲)의 노령(老齡)이신 어머님을 다시 모시게 된 남편(男便) 박씨(朴氏)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 부부(夫婦)는 보리밥에 된장찌개 밖에 대접할 수 없는 형편을 아쉬워하면서도 합심(合心)하여 노모(老母)를 극진히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나, 시모(媤母)님은 날이 감에 따라 최여사(崔女史)가 불구자(不具者)임을 못마땅히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모(媤母)님의 처사(處事)를 조금도 섭섭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더욱 며느리로서의 정성(精誠)을 다하여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나, 노년(老年)하신 시모(媤母)님은 몇 년 후(年後) 감기증세(感氣症勢)로 시름시름 앓다가 중풍(中風)으로 쓰러지게 되어 문밖 출입(出入)도 못하게 되니, 시모(媤母)님께 마지막 효(孝)를 다할 기회(機會)라 생각한 최여사(崔女史)는, 불구(不具)의 몸이면서도 그 날부터 용변(用便)을 받아내야 하는 고역(苦役)에도 귀찮아하는 기색(氣色)하나 없이, 언제나 웃는 얼굴로 구환(救患)에 정성(精誠)을 쏟았다.
그러던 중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男便)마저 폐병삼기(肺病三期)의 중환(重患)으로 자리에 눕게 되니 최여사(崔女史)는 엄청난 충격(衝擊)에 몸들 바를 몰랐다.
그러나 두 자녀(子女)의 학비(學費)와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의 구환(救患)을 위하여 최여사(崔女史)는 밤낮으로 궂은 일을 마다 않고 땀을 흘렸으며 간병(看病)에 열중하였다.
이 딱한 사정(事情)을 보다못한 동민(洞民)들이 그들을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로 책정(策定)해 주었으며, 구판장(購販場)을 운영(運營)토록 도와 주었고, 부녀회(婦女會)에서도 성금(誠金)을 기탁(寄託)하는 등 각계(各界)의 온정(溫情)이 뒤따랐다.
최여사(崔女史)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정성(精誠)을 다해 두 분을 살리고야 말겠다." 는 일념(一念)으로 오늘도 구환(救患)과 생활(生活)에 진심전력(盡心竭力)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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