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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복(李車福) 여사(女史)가 중시하(重侍下)에다 시(媤)누이, 시(媤)동생이 5남매(男妹)인 대가족(大家族)의 종가(宗家)의 장남(長男) 박승주씨(朴承柱氏)와 결혼(結婚)한 것은 19세(勢) 때였다.
시댁(媤宅)첫발을 들여놓기가 바쁘게 그는 오랜 지병(持病)으로 신음(呻吟)중인 시조모(媤祖母)님의 병간호(病看護)에 매달려야 했다.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일은 물론, 조석(朝夕)으로 미음을 끓여서 5년(年) 동안 시봉(侍奉)하였다.
그러나 그가 조석(朝夕)으로 마음을 졸여가며 봉양(奉養)한 정성(精誠)도 헛되어, 시조모(媤祖母)님은 발병(發病)한 지 5년(年)째 되던 해에 별세(別世)하셨다.
그 후(後) 3년간(年間)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제상(祭床)을 차려 시조모(媤祖母)님에 대한 예(禮)를 다하였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커다란 시련(試鍊)이 그에게 닥쳤다.
대학(大學)에 다니던 시(媤)동생이 1974년(年) 암(癌)으로 입원(入院)하게 되고 그 충격(衝擊)으로 시모(媤母)님마저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는 이중(二重)의 고난(苦難)이 닥쳐온 것이다.
그는 이런저런 고민(苦悶)으로 밤이면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낮이면 병(病)구완과 근심으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고민(苦悶)과 낙담(落膽)으로 주저앉아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는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을 도와 농사(農事)일에 손을 보태는 동시에, 병원(病院)에 입원중(入院中)인 시(媤)동생과 집안에 누워 계시는 시모(媤母)님을 번갈아 간병(看病)하면서 바쁜 일손에 놀렸다.
또한 암(癌)에 좋다는 약(藥)과 중풍(中風)에 잘 듣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수소문하여 백방(百方)으로 헤맨 적인 허다(許多)하였으며 전국(全國)을 멀다 않고 찾아 다녔다.
이런 이여사(李女史)를 두고 동네 부인(婦人)들이 "환자(患者)도 환자(患者)지만 아주머니가 먼저 쓰러져 죽겠소."하며 안쓰러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의 이렇게 지극(至極)했던 정성(精誠)과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시(媤)동생도 마침내 유명(幽明)을 달리하게 되었다.
일은 고되고 신경(神經)은 바늘 끝같이 날카로워서, 이제 이여사(李女史) 자신(自身)이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狀況) 속에, 어느 날 남편(男便)이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급보(急報)가 전해 왔다.
이여사(李女史)가 병원(病院)에 달려갔을 때 남편(男便)은 의식불명(意識不明)인 채 뇌수술(腦髓手術)을 받고 있었다.
수술실(手術室) 밖에서 기다리던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의 생명(生命)만이라도 건지게 해 달라는 간절(懇切)한 기도(祈禱)를 드리고 있었다.
다행히 남편(男便)의 생명(生命)은 건졌으나,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이여사(李女史)의 지극(至極)한 간병(看 病)도 소용없는 듯 남편(男便)은 식물인간(植物人間)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차복(李車福) 여사(女史)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편(男便)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간병(看病)에 변함없는 정성(精誠)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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