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성태분(成泰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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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월성군 내산면
효부(孝婦) 성태분(成泰粉) 56세

성태분(成泰粉) 여사(女史)가 이종선씨(李鍾鮮氏)와 결혼(結婚)한 것은 나이 16세(歲)때였다. 

그의 시댁(媤宅)살림은 가난에 쪼들리는 일은 없이 살 수 있는 가산(家産)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 것은 남편(男便) 이씨(李氏)의 낭비벽(浪費癖)과 도박벽(賭博癖)이었다. 

집안 살림을 보살피기보다는 눈만 뜨면 노름판을 찾는 남편(男便)의 빗나가는 행실(行實)앞에 물려받은 가산(家産)이 온전(穩全)할 리 없었다.

하지만 시부모(媤父母)님들은 남편(男便)의 행실(行實)을 꾸짖기보다는 가산(家産)이 기울어진 원인(原因)이 며느리를 잘못들인 때문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성여사(成女史)를 질책(叱責)하기 시작했고, 성여사(成女史)는 남편(男便)과 시부모(媤父母)님의 틈바구니에서 병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고심(苦心)하였다. 

6.25 사변(事變)으로 남편(男便)이 입대(入隊)하게 되자, 성여사(成女史) 혼자 힘으로 집안의 안팎 일을 꾸려나가야 했다. 

시부모(媤父母)님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지만 "진심(眞心)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한다면 그 분들도 언젠가는 며느리의 심정(心情)을 이해(理解)해 주시겠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성심성의(誠心誠意)를 다하여 웃어른을 봉양(奉養)하였다. 

어느 해 시모(媤母)님은, 43세(歲)의 늦은 나이로 시(媤)동생을 낳고 곧 산후병(産後病)으로 눕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2개월 후(2個月 後)에는 성여사(成女史)도 역시 득남(得男)을 하게 되었다. 

시모(媤母)님이 산후병(産後病)으로 누워 계신 때문에 성여사(成女史)는 첫7일도 넘기지 전(前)에 기동(起動)하여 시모(媤母)님의 산후(産後) 구완에 몸을 매달아야 했고, 두 갓난 아기에게 젖을 번갈아 물려야 했다. 

하지만 가세(家勢)는 더욱 기울어져 마침내는 남편(男便)의 노름빚으로 인(因)하여 파산지경(破産地境)에 이르게 되자, 시부(媤父)님은 화병으로 쓰러지고 이어 시모(媤母)님도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이로 인(因)하여 성여사(成女史)는 낮에는 지게를 지고 산(山)을 헤매며 밭일이든, 품팔이는 서슴지 않았으며, 밤이면 늦도록 길쌈을 하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의 간병(看病)에 신경(神經)을 써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별을 보며 일어나 물지게를 지고 300여(餘)m나 되는 곳에서 우물물을 길어다 아침밥과 쇠죽을 장만하고, 손수 지게를 지고 산(山)에 가서 땔감을 해야 했고, 농사(農事)철에는 여자(女子)의 몸으로 직접(直接) 논갈이나 밭갈이의 힘든 일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겨울이면 산나물과 칡뿌리로, 봄이면 쑥나물죽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성여사(成女史)의 지극(至極)한 간병(看病)에 힘입어 시부(媤父)님은 장수(長壽)를 누리다가 85세(歲)에 별세(別世)하였으며, 8년여(年餘)를 끌어온 시모(媤母)님의 중풍(中風)은 비록 쾌유(快癒)는 못되었지만 기동(起動)하실 정도로 호전(好轉)되어 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듯이, 성여사(成女史)의 이러한 눈물겨운 효심(孝心)에 감동(感動)한 시모(媤母)님은, 성여사(成女史)의 효성(孝誠)을 칭찬(稱讚)하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인근주민(隣近住民)들 또한 성여사(成女史)를 마을의 자랑거리라고 입을 모아 칭송(稱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