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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해(金鍾海) 여사(女史)가 임재수씨(林栽秀氏)와 결혼(結婚)한 것은 19세(歲) 때이다.
그러나 시댁(媤宅)은 신혼부부(新婚夫婦)의 방(房) 하나 제대로 차려 줄 수 없는 빈한(貧寒)한 가정(家庭)인 관계로, 김여사(金女史)의 시집살이는 한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더우기 시부(媤父)님과 시모(媤母)님이 반신불수(半身不隨)로 함께 와병 중(臥病中)인 관계로 집안의 앞날은 더욱 암담(暗澹)하기만 하였다.
신혼(新婚)의 며칠을 한숨 속에서 보낸 김여사(金女史)는, 언제까지나 운명(運命)을 탓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음을 깨달았다.
인내(忍耐)와 용기(勇氣)로 모든 험(險)한 길을 이겨나간다면 언젠가 밝은 날이 오리라는 막연(漠然)하나마 기대(期待)와 확신(確信)을 가지고, 시부모(媤父母)님의 간병(看病)부터 온갖 정성(精誠)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남편(男便)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며 손바닥 만한 농토(農土)이지만 열심(熱心)히 가꾸며 부지런히 살아 나갔다.
그러나 끈질긴 노력(努力)에도 불구(不拘)하고 조금도 가정(家庭)살이의 향상(向上)이 이루어지지 않자, 남편(男便) 임씨(林氏)는 농촌생활(農村生活)에 환멸을 느낀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무작정(無酌定) 도시(都市)로 감춰 버렸다.
김여사(金女史)는 한 때 좌절(挫折)하고 실의(失意)에 잠겼으나, 티없이 자라는 어린 자식(子息)들에게 용기(勇氣)와 희망(希望)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도 분발(奮發)하여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겠지 하며, 시부(媤父)님을 극진(極盡)히 병(病)구완하였다.
그러나 극진(極盡)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시부(媤父)님마저 몇 년 후(年後)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그러자 김여사(金女史)는 "모든 것이 나의 불효(不孝)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며칠을 두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였다.
김여사(金女史)는 시부(媤父)님께 못다한 효성(孝誠)을 시모(媤母)님께 바치기로 굳게 결심(決心)하고, 다음 날부터 더욱 극진히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년 전(年前) 가족(家族)을 버린 채 도시(都市)로 떠나버렸던 남편(男便)이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여보 미안(未安)하오, 모든 것은 내가 잘못했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悔改)하는 남편(男便) 앞에, 김여사(金女史)는 무사(無事)히 돌아온 것만도 고맙다고 말하면서 감사(感謝)의 눈물을 흘렸다.
김여사(金女史)와 그의 남편(男便)은 힘을 합쳐 열심(熱心)히 농토(農土)를 가꾸면서 슬하(膝下)의 4남매(男妹)를 알뜰히 키워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모(媤母)님께서 노환(老患)까지 겹쳐 날마다 몇 차례씩이나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내야 했지만, 김여사(金女史)는 언제나 상냥한 미소(微笑)를 잃지 않고 용변처리(用便處理)며 목욕(沐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있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였다.
'사랑을 낳는 것은 사랑뿐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매사(每事)을 오직 사랑으로 감싸고 사랑으로 행동(行動)하는 김여사(金女史)의 숭고(崇高)한 효성(孝誠)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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