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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분(朴季分) 여사(女史)는 6.25 사변(事變)이 일어났던 다음 해인 1951년(年) 가을에 나이 22세(歲)로 결혼(結婚)을 하였다.
당시 시가(媤家)에는 시부모(媤父母)와 시(媤)동생 4명(名)이 있었는데, 박여사(朴女史)까지 합쳐 모두 여덟 식구(食口)가 남의 땅 600평(坪)을 경작(耕作)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나라와 겨레에게 크나 큰 상처(傷處)를 안겨 주었던 6.25사변(事變)은, 박여사(朴女史)에게도 인생(人生) 전체(全體)의 향방(向方)을 가름하는 충격(衝擊)을 가져다 주었다.
신혼(新婚)의 단꿈이 깨기도 전(前)인 그 해 겨울에 입대(入隊)한 그의 남편(男便)이 그 이듬해인 1952년(年) 10월(月)에 젖먹이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전사(戰死)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여덟 식구(食口)의 가장(家長)이 된 박여사(朴女史)는 남편(男便)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당장 가족(家族)들의 생계(生計)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산나물을 캐어다가 팔기도 하고, 또한 남의 집 품삯 일도 하여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媤)동생들의 학비(學費)에 보태기도 하면서 10년(年)을 하루같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왔다.
불과(不過) 600평(坪)의 남의 땅을 경작(耕作)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생계유지(生計維持)가 되지 않아서 새끼꼬기와 홀치기 등으로 밤을 세운 날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던 중 국가(國家)의 도움으로, 1969년(年) 9월(月)에 원호청(援護廳)에서 원호가족(援護家族)에게 장기융자(長期融資)해 주는 20만(萬)원을 대부(付貸)받아, 800평(坪)의 논을 매입(買入)해서 처음으로 자기소유(自己所有)의 땅을 갖게 되었다.
시집온 후(後) 처음 맛보는 기쁨과 희망(希望)을 안고 가을의 수확(收穫)에 보람을 느끼며, 삽,괭이, 지게와 싸우며 남자(男子)도 하기 힘든 일들을 척척 해 냈다.
항상 어렵고 힘든 생활(生活)이었지만,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들에 쏟은 박여사(朴女史)의 정성(精誠) 또한 눈물겨운 것이었다.
'참된 일꾼이 되자'를 가훈(家訓)으로 정(定)한 그는, 시(媤)동생들에게는 오직 공부(工夫)에만 열중(熱中)토록 하고 정성(精誠)을 다해서 뒷바라지 하였다.
박여사(朴女史)의 이러한 눈물겨운 원조(援助)에 힘입어, 맏시(媤)동생은 1979년도(年度) 행정고시(行政考試)에 합격(合格)했고, 그 아래 두 시(媤)동생들도 공무원시험(公務員試驗)에 합격(合格)하여 현재(現在) 공무원(公務員)으로 국가(國家)에 봉사(奉仕)하고 있다.
그 동안 박여사(朴女史)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모셔 왔다.
6년전(年前)인 1976년(年)부터 악화(惡化)된 시부모(媤父母)님의 병(病)구완을 위해, 때로는 험(險)한 산 속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 오기도 했고, 때로는 수십리(數十里)길을 달려가 의사(醫師)를 모시고 오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항상 식사(食事) 때는 두분에게 일일이 손수 밥을 떠먹여 드리고 있으며, 대소변(大小便)의 처리(處理)도 혼자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일찌기 남편(男便)을 잃은 청상(靑孀)의 몸으로 개가(改嫁)의 길도 버리고, 가난한 살림에 시부모(媤父母)를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하고, 시(媤)동생 뒷바라지에 온 힘을 기울여 국가(國家)의 일꾼으로 자립(自立)시킨 박여사(朴女史)야말로, 진정(眞正)한 한국여성(韓國女性)의 참된 길을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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