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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석(崔春錫)여사(女史)가 죽은 그의 남편(男便)과 결혼(結婚)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전(年前) 1942년(年) 11월(月)이었고, 그 때 그 의 나이 19세(歲)였다.
그 때 그의 시가(媤家)에는 시부모(媤父母)를 비롯하여 한 살짜리부터 열 두 살까지 다섯이나 되는 시(媤)동생들이 있었다.
당시(當時) 시가(媤家)는 초근복피(草根木皮)로 끼니를 겨우 있는 가난한 살림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는 일과 다섯이나 되는 시(媤)동생들의 뒷바라지하는 일은 어린 신부(新婦)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으나, 그런 고생쯤은 천성(天性)이 온순(溫順)하고 성실(誠實)하며 인내심(忍耐心)이 강(强)했던 최여사(崔女史)에게는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結婚)한 지 1년(年)도 못되어 남편(男便)이 갑자기 병(病)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자, 시부모(媤父母)님 봉양(奉養)에,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에 또 여덟 식구(食口)라는 대가족(大家族)을 먹여 살려야 하게 되니, 최여사(崔女史)의 정신적(精神的), 육체적(肉體的), 고통(苦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최여사(崔女史)는 마음을 굳게 다짐하고 남편(男便)의 병석(病席)을 주야(晝夜)로 따뜻하게 보살피는 한편,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들에게도 더욱 정성(精誠)을 기울여 알뜰하게 가정(家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아내의 이렇듯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에도 불구하고 남편(男便)은 득병(得病) 4년(年)만에 세상(世上)을 떠났으니 최여사(崔女史)는 하루아침에 슬하(膝下)에 자식(子息)하나 없는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24세(歲), 그를 아끼는 많은 친지(親知)들이 아까운 청춘(靑春)을 썩히지 말고 새 삶을 찾으라고 권유(勸誘)했으나, 일부종사(一夫從事)에 대한 최여사(崔女史)의 신념(信念)은 단호(斷乎)하였다.
오히려 최여사(崔女史)는 남편(男便)을 잃은 슬픔을 속으로 삼킨 채, 전보다 몇 갑절 더 정성(精誠)들여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들을 보살폈다.
그런데 불행(不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8년(年)부터는 시부(媤父)님이 중풍(中風)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고, 다음 해엔 시모(媤母)님마저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됐던 것이다.
최여사(崔女史)는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 있는 시부모(媤父母)님을 번갈아가면서 간호(看護)해야 했고, 매일(每日)같이 식사(食事) 시중은 물론, 두 분의 대소변(大小便)까지 받아내고, 또 사방(四方)으로 다니며 좋은 약(藥)을 구(求)해 치료하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최여사(崔女史)의 효성(孝誠)도 보람없이 1980년(年)에는 시부(媤父)님이, 그리고 1982년(年)에는 시모(媤母)님이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말았다.
60평생(平生)을 시부모(媤父母)님과 시(媤)동생들을 위하여 일신(一身)을 희생(犧牲)하였으니. 이와 같은 최여사(崔女史)의 희생정신(犧牲精神)에 감복(感服)해 온 시(媤)동생들은, 모친상(母親喪) 때 6남매(男妹)가 뜻을 모아 그 동안의 노고(勞苦)를 재삼(再三) 치하(致賀)드리고, 형수(兄嫂)를 극진한 정성(精誠)으로 모실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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