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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歲)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후(後) 30여년(餘年)이라는 기나 긴 세월(歲月)을 오로지 시부모(媤父母)와 시가(媤家)의 식구(食口)들을 위해 자신(自身)을 희생(犧牲)하여 온 열녀(烈女)이자 효부(孝婦)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위출(李渭出) 여사(女史).
이여사(李女史)는 중류층(中流層)의 가정(家庭)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여필종부(女必從夫)'와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가훈(家訓)아래 여자(女子)된 도리(道理)를 배우며 자랐다.
이여사(李女史)는 16세(歲)에 결혼(結婚)하게 되었는데, 그가 출가(出嫁)한 시댁(媤宅)에는 노년(老年)하신 시부모(媤父母)와 어린 시(媤)누이, 시(媤)동생 등 모두 여덟 식구(食口)가 끼니마다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고, 게다가 시부모(媤父母)님은 오랜 지병(持病)으로 항상 병석(病席)에 누워 있었다.
남편(男便)과 함께 열심히 일을 하여 하루하루의 품삯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시부모(媤父母)님의 병간호(病看護)에도 온갖 정성(精誠)을 쏟았으나 1년 후(年後)에 시부(媤父)님은 구료(救療)의 보람도 없이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말았고, 이어서 6.25 전쟁(戰爭)은 열 아홉 어린 새색시를 자식(子息)하나 없는 청상과부 (靑霜寡婦)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하늘같이 믿었던 남편(男便)을 잃은 엄청난 슬픔을 안은 이여사(李女史)는, 그 날부터 온 식구(食口)의 생계(生計)와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를 혼자서 떠맡아야 했다.
이와 같이 이중(二重)의 고난(苦難)을 한 몸에 지고 불철주야(不撤晝夜)로 온갖 노력(努力)과 정성(精誠)을 바쳐 오는 자식(子息)없는 청상과부(靑孀寡婦)에 대한 주위(周圍)의 끈질긴 유혹(愚惑)과 개가(改嫁)의 권유(勸誘)도 있었으나, 남달리 엄격(嚴格)한 가정교육(家庭敎育)을 받고 자란 이여사(李女史)의 친정(親庭)과 시댁(媤宅)에 불명예(不名譽)스러운 오점(汚點)을 남기지 않겠다는 정절(貞節)에 대한 굳은 결심(決心)을 꺾지는 못하였다.
비장(悲壯)한 각오(覺悟)로 일어선 이여사(李女史)는, 1952년(年)부터는 풍기읍내(豊基邑內)에 소재(所在)하는 직물공장(織物工場) 종업원(從業員)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시(媤)동생, 시(媤)누이, 5남매(男妹)를 훌륭한 사회인(社會人)으로 성장(成長)시켜, 지금은 모두 성혼(成婚), 출가(出嫁)시켜 남부럽지 않은 단락(團樂)한 가정(家庭)을 꾸미게 해 주었다.
계속하여 병석(病席)에 누워 계시는 시모(媤母)님에게도 꾸준히 정성(精誠)을 바쳐 왔으니, 1967년(年)부터 병(病)이 더욱 악화(惡貨)되었다가 결국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이제 이여사(李女史)는 홀로 활동(活動)마저 불편(不便)한 몸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의 제사(祭祀)를 극진(極盡)히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생(一生)을 한결같이 자기(自己) 한 몸을 희생(犧牲)하여 시가(媤家)의 행복(幸福)을 위하고 자신(自身)의 정절(貞節)을 지켜 온 이여사(李女史)의 거룩한 행적(行績)이야말로, 높이 평가(評價)되고 모든 사람에게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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