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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남(金後男) 여사(女史)는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의 사촌동(沙村洞)이라는 산간벽촌(山間僻村)에서 6남매(男妹) 중 3녀(女)로 태어났다.
부친(父親)이 일제시(日帝時) 징용(徵用)으로 끌려 나가시고, 오라버니는 6.25때 전사(戰死)한 어려운 환경(環境)속에서, 김여사(金女史)는 어릴 적부터 소꼴도 베고 동생 3남매(男妹)도 돌보며 궁핍(窮乏)한 집안살림을 도우면서 자랐다.
21세(歲) 되던 해에 결혼(結婚)하였으나 결혼(結婚)하자말자 남편(男便)은 군(軍)에 입대(入隊)하고 말았기 때문에, 김여사(金女史)는 그 때부터 시부모(媤父母)님께는 아들 노릇까지 겸(兼)하면서 봉양(奉養)해야 했다.
더우기 시부(媤父)님은 15년 전(年前)부터 심(甚)한 폐결핵(肺結核)으로 고생(苦生)을 해 오고 있는 터라 생계(生計)도 유지(維持)하기 어려운 살림에 시부(媤父)님의 병(病)구완까지 해야 하는 김여사(金女史)의 고초(苦楚)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여사(金女史)는 자신(自信)의 고통(苦痛)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남의 집 품삯일을 해서 번 돈으로 시부(媤父)님의 약(藥)을 사드리는 한편,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더렵혀진 옷을 갈아 입히고 목욕(沐浴)을 시켜 드리는 등 시부(媤父)님의 병간호(病看護)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며느리의 이와 같은 정성(精誠)에도 불구(不拘)하고 시부(媤父)님은 결국 세상(世上)을 뜨시고 말았고, 시부(媤父)님의 별세 후(別世後) 김여사(金女史)는 소상(小祥), 대상(大祥), 3년상(年上)을 정성(精誠)으로 지내고 지금까지 기일(忌日) 때마다 극진(極盡)하게 제사(祭祀)를 차려 모시고 있다.
그러는 중에 시모(媤母) 85재(才)님 또한 노환(老患)으로 눈, 귀가 어두워지고 기동(起動)조차 못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도 6년 전(年前)부터는 자신(自身)의 몸이 극도(極度)로 쇠약(衰弱)해져, 갑상선(甲狀腺) 및 임파선염(淋巴腺炎)으로 신고(辛苦)하면서도 이를 조금도 내색(內色)하지 않고, 시모(媤母)님의 병(病)구완에만 정성(精誠)을 쏟아 왔다.
또 한편으로는 집안 살림에도 힘을 써서, 군(軍)에서 제대(除隊)한 남편(男便)이 직장(職場)을 잃고 난 뒤 실의(失意)에 빠져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자 자신(自身)이 팔을 걷고 나서서 남의 빨래, 농사일 등 날품팔이를 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돼지 3마리와 송아지 1마리를 구입(購入), 매일(每日) 12km나 되는 시내(市內)에 리어카를 끌고 나가 식당(食堂)에서 버리는 음식(飮食)찌꺼기를 모아 와서 먹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감복(感服)한 남편(男便)도 드디어 새로운 인생출발(人生出發)을 시작하였고, 자녀(子女)들도 어머니의 효행(孝行)과 성실(誠實)한 삶에 감화(感化)되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김여사(金女史)의 집안은 화목(和睦)하고 행복(幸福)한 가정(家庭)이 되었다.
김여사(金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과 성실(誠實)한 생활(生活)이 이제 그 대가(代價)를 보상(補償)받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現代) 회사(會社)에서는 보기 드문 효행(孝行)과 부덕(婦德)으로 어려운 처지(處地)를 슬기롭게 극복(克服)한 김여사(金女史)야말로 타(他)에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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