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강옥(呂康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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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김천시 남산동
효부(孝婦) 여강옥(呂康玉) 42세

여강옥(呂康玉) 여사(女史)는 선조대대(先祖代代)로 효자(孝子), 효부(孝婦), 열녀(烈女), 충신(忠臣)을 잇달아 배출(輩出)한 명문가(名門家)의 무남독녀(無男獨女)로 태어났다. 

조상(祖上)들의 정신(精神)을 그대로 이어받은 여여사(呂女史)는, 어려서부터 성품(性品)이 온후(溫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해 이웃으로부터 칭송(稱頌)을 받으며 자랐다. 

여여사(呂女史)는 그의 나이 28세(歲) 되던 해에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로 출가(出嫁)할 때까지는, 자식(子息)이라고는 자신(自身) 하나밖에 없는 친정(親庭)의 노부모(老父母)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였다. 

그런데, 여여사(呂女史)가 결혼(結婚)하던 이듬해, 친정(親庭)어머니가, 심장병(心臟病)으로 앓아 눕게 되었다. 

의탁(依託)할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친정(親庭)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서는 자신(自身)이 희생(犧牲)하는 수밖에 없고, 또 당연(當然)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여여사(呂女史)는, 남편(男便)과 상의(相議)하여 친정부모(親庭父母)님을 그들이 살고 있는 단칸세방(單間貰房)으로 모셔 왔다. 

10여(餘)차례나 세방(貰房)을 옮겨 다녀야 했던 어려움 속에서도 여여사(呂女史)와 그의 남편(男便)은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있는 정성(精誠)을 다 바쳐 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에 진력(盡力)하였다. 

그러나 친정(親庭)어머니는 딸과 사위의 지극(至極)한 간호(看護)에도 불구(不拘)하고 발병(發病) 6년(年)만에 별세(別世)하시고 말았다. 

그런데 어머니를 선산(先山)에 모시고 나자말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에는 아버님마저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다. 

여여사(呂女史)는 아버님 병(病)에 좋다는 약(藥)은 백방(百方)으로 구(求)하여 시탕(侍湯)해 드리는 한편, 식사(食事)시중,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등 병(病)구완에 온갖 정성(精誠)을 기울였으나, 아버님마저 역시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1980년(年)에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친정부모(親庭父母)님들이 무사(無嗣)한 채로 세상(世上)을 떠나시자, 여여사(呂女史)는 그 동안 뜨개질 등으로 틈틈이 모아 둔 돈으로 부모(父母)님 묘소(墓所)에 상석(床石)을 마련하고, 친정(親庭)쪽의 조카를 입양(入養)시켜 후사(後嗣)를 잇게 하였다. 

여여사(呂女史)는 또한 시부모(媤父母)님과 남편(男便) 및 그 외(外) 시가(媤家)의 식구(食口)들에게도 효성(孝誠)과 정성(精誠)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경찰관(警察官)인 남편(男便)은, 여여사(呂女史)의 훌륭한 내조(內助)에 힘입어 1972년(年)에는 경찰관(警察官)으로서는 최고(最高)의 명예(名譽)인 '무궁화 봉사왕(無窮花 奉仕王)'에 선정(選定)되는 영광(榮光)을 안기도 하였다. 

또한 여여사(呂女史)는 경로효친사업(敬老孝親事業)에도 앞장서, 남편(男便)과 함께 지금까지 수차에 걸쳐서 노인(老人)들을 위한 잔치를 열거나, 양로원(養老院) 등을 찾아가 자식(子息)없이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老人)들을 위로(慰勞)해 주기도 하였다. 

여여사(呂女史)의 이과 같은 행적(行績)이 세상(世上)에 서서(徐徐)히 알려지기 시작하여, 1974년(年) 9월(月)에 효부상(孝婦賞)을, 그리고 1981년(年) 9월(月)에는 유도회(儒道會) 경북지부장(慶北支部長)의 효녀상(孝女賞)을 받기도 하였다. 

여여사(呂女史)의 지극(至極)한 효행(孝行)과 보기 드문 내조자(內助者)로서의 정성(精誠)과 경로효친(敬老孝親)은, 높이 평가(評價)되고 있으며 만인(萬人)의 귀감(龜鑑)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