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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훈씨(徐商熏氏)는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의 가난한 농가(農家)에서 태어났다.
영해중학교(寧海中學校)를 졸업(卒業)한 뒤 부모(父母)님의 농사(農事)일을 돕게 되었으나, 손바닥 만한 전답(田畓) 몇 마지기는 생활(生活)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1958년(年)에 가까운 도시(都市)인 포항(浦項)으로 단신이주(單身移住)하였다.
그 후(後) 몇 년(年) 동안 날품팔이, 막노동(勞動)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모은 돈으로, 서씨(徐氏)는 마침내 밭 1500평(坪)을 가지게 되어 자영(自營)하였고, 다시 몇 년 후(年後)에는 현재(現在)의 부인(婦人)과 결혼(結婚)하여 슬하(膝下) 4자녀(子女)를 두고 있다.
지금도 비록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힘들게 살아왔던 자신(自身)의 과거(過去)를 잊지 않고 있는 그는, 평소(平素) 늘 자신(自身)보다 어려운 사람을 찾아 도와 주면서 살고 있으며, 지역사회(地域社會) 발전(發展)에 봉사(奉仕)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서씨(徐氏)의 장(壯)한 행적(行績)들 중(中) 몇 가지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1975년(年) 2월경(月頃) 추위에 떨며 걸식(乞食)하던 김재홍 노인(老人) 68세(歲)을 자기(自己)집으로 데려와 1년(年) 이상(以上)을 함께 살면서 연고자(緣故者)를 찾던 중(中), 영천(永川)에 사는 김노인(金老人)의 조카와 연락이 되어, 김노인(金老人)으로 하여금 편안(便安)한 여생(餘生)을 보내도록 해 주었다.
또 1978년(年) 6월경(月頃)에는 형산강(兄山江) 제방 둑에 움막을 짓고 살던 유진기 47세(歲)라는 사람이 폐결핵(肺結核)으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發見), 즉시 자기집으로 데리고 와서 계속 병간호(病看護)를 해 주면서 현재(現在)까지도 같이 살고 있으며, 1980년(年) 5월(月)에도 역시 폐결핵(肺結核) 환자(患者)로 방랑생활(放浪生活) 하고 있던 이재환씨(34歲氏)를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1980년(年) 3월(月)에는 길가에 버려져 다 죽게 된 아이를 이웃 사람이 업고 온 것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친딸처럼 키우고 있는 등, 서씨(徐氏)는 오로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程度)로 불우(不遇)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한편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서씨(徐氏)는 가정적(家庭的)으로 지극(至極)한 효자(孝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올해 83세(歲)된 노모(老母)가 계시는데, 1971년(年) 5월(月)부터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이 불가능(不可能)하게 되자, 조석(朝夕)으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백방(百方)으로 양약(良藥)을 구(求)하여 구환(求患)을 해오고 있는 중(中)이다.
이와 같은 서상훈씨(徐商勳氏)의 선행(善行)과 효행(孝行)이 알려지면서, 이웃 사람들의 칭송(稱頌)은 물론, 1982년(年) 1월(月)에는 KBS TV에 미담(美談)의 주인공(主人公)으로 전국(全國)에 방영(放映)된 바도 있다.
어려운 가정(家庭)살이에서도 서상훈씨(徐商熏氏)는 불우(不遇)한 사람을 구제(救濟)하고, 내 가족(家族)과 같이 사랑함은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실행(實行)한 거룩한 봉사자(奉仕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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