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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효(孝)의 실천규범(實踐規範)dl 되어 온 “효경”(孝經)에는 효(孝)에 관한 여러 가지 덕목(德目)이 들어있는데, 그 중(中)에는 '돌아가신 뒤의 제사(祭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句節)도 있다. 이것은 생전(生前)의 효도(孝道)가 사후(死後)까지도 계속(繼續)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强調)한 것으로, 우리의 가정의례(家庭儀禮)에서 전통적(傳統的)으로 제사(祭祀)를 중요시(重要視)해 온 것도, 바로 이와 같이 조상(祖上)님들에 대한 사후(死後)의 효도(孝道)를 다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社會)가 복잡(複雜)하게 발전(發展)하고, 인간(人間)이 점점 더 간변(簡便)한 삶을 추구(追求)하게 되면서부터 이 제사(祭祀)는 차츰 소홀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現實)인 듯하다, 이러한 현실(現實)에서, 한 달에도 몇 번씩 있는 제사(祭祀)를 항상 성심성의(誠心誠意)껏 보시면서, 또한 살아계신 시부모(媤父母)님께도 극진(極盡)한 효성(孝誠)을 바쳐 주위(周圍)의 모범이 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송미경(宋美璟) 여사(女史)이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효성심(孝誠心)이 강(强)하고 우애(友愛)가 두터웠던 송여사(宋女史)는, 명문(名門)의 종부(宗婦)로 출가(出嫁)하여 시가(媤家)의 가계(家計)와 누대(累代) 제사(祭祀)를 맡게 되었다.
어려운 살림에 하루가 멀다 하고 닥치는 제사(祭祀)를 일일이 정성(精誠)껏 모시기란 그의 쉬운 일이 아닐텐데, 집안 살림 걱정도 좀 하라는 이웃의 비난조(非難調)의 충고(忠告)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운래(元來) 효성(孝誠)이 강(强)하고 또한 전통윤리(傳統倫理)에 대한 이해(理解)가 깊었던 송여사(송女史)는 묵묵(默默)히 자신(自身)의 맡은 일을 충실(忠實)히 행(行)하였다.
송여사(宋女史)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살아계신 시부모(媤父母)님의 봉양(奉養)에 대(對)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행(不幸)히도 시모(媤母)님 풍천임씨(豊川林氏)께서는 중병(重病)으로 4,5년간(年間)에 걸쳐 평안(平安)한 날이 드물었고, 더구나 그 중(中) 1년간(年間)은 중풍(中風)으로 와병(臥病), 기동(起動)조차 못하시니 송여사(宋女史)는 부군(夫君)과 합심(合心)하여 귀(貴)한 약(藥)들을 구(求)하여 달여 드리는 한편 항상(恒常) 환자(患者)곁에 지켜 앉아서 병간호(病看護)는 물론, 목욕(沐浴), 청소(淸掃), 대소변(大小便) 처리(處理), 의복(衣服)이나 침구(寢具)의 세탁(洗濯) 등에 온갖 정성(精誠)을 다 바쳤다.
흔히 중풍환자(中風患者)가 누워 있는 방은 악취(惡臭)가 나고 불결(不潔)하기 마련이지만, 늘 송여사(宋女史)의 손길이 닿고 있는 시모(媤母)님의 방(房)은 오히려 건강(健康)한 다른 사람들의 방(房)보다 더 깨끗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여사(宋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도 불구(不拘)하고 시모(媤母)님은 71세(歲)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고 말았다. 그러자 송여사(宋女史)는, 시모(媤母)님이 세상(世上)을 떠난 것이 자신(自身)의 봉친(奉親)이 성(誠)이 부족(不足)했던 소치(所致)이기나 한 듯이, 거의 한 달 동안을 음식(飮食)을 폐(廢)하고 비통(悲痛)한 나날을 보냈다.
시부(媤父)님이 꾸짖음과 남편(男便), 시(媤)동생들의 충고(忠告)와 설득(說得)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송여사(宋女史)는, 홀로 남은 시부(媤父)님을 몇 배(倍) 더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모시고 있다. 또한 남은 시(媤)동생들도 알뜰하게 거두고, 3남매(男妹)에 대한 가정교육(家庭敎育) 또한 철저(徹底)하니, 가정(家庭)이 늘 화목(和睦)하고, 이웃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稱頌)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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