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배순자(裵順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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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대구 남구 이천동
효부(孝婦) 배순자(裵順子) 36세

배순자(裵順子)여사(女史)는 가난한 농촌(農村)의 어려운 환경(環境)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16세(歲)때에 남편(男便)인 정용수씨(鄭龍守氏)와 결혼(結婚)하였다. 

조상(祖上) 대대(代代)로 물려받아 온 가난을 운명(運命)처럼 여기며 살아오던 당시(當時)도, 오늘의 농촌(農村)의 실정(實情)과 매한가지로, 배여사(裵女史)의 시가(媤家)역시 가산(家産)이라고는 논 한 마지기도 제대로 없는 어려운 형편(形便)이었다. 

천성(天性)이 어질고 착한 배여사(裵女史)는, 어려운 생활(生活) 속에서도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소작(小作)을 하는 남편(男便)을 도와 농사(農事)를 지으면서, 비록 가난은 했지만 화목(和睦)한 가정(家庭)을 꾸려왔는데 어느덧 4남매(男妹)의 자녀(子女)를 두게 되었다. 

이렇듯 가난은 하지만 행복(幸福)하였던 배여사(裵女史)의 가정(家庭)에 불행(不幸)이 닥친 것은 3년 전(年前), 그 동안 정정(亭亭)하시던 시모(媤母)님께서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앓아 눕게 되면서부터였다. 

오른쪽 수족마비(手足痲痺)로 기동(起動)조차 불편(不便)하고, 식사(食事) 시중은 물론, 중풍(中風)에 잘 듣는다는 약(藥)을 백방(百方)으로 구(求)해 드리는 등, 극진(極盡)한 병(病)구완의 정성(精誠)에도 불구(不拘)하고 별차도(別差道)가 보이지 않자, 남편(男便)과 함께 손수 리어카에 시모(媤母)님을 태우고 한의원(漢醫院)을 찾아 다니기도 하였다. 

그 동안 한 푼, 두 푼 모아 두었던 돈은 1년(年) 동안의 시모(媤母)님 치료비(治療費)로 다 쓰이고 가세(家勢)는 형편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格)으로 남편(男便)마저 갑자기 신경통증세(神經痛症勢)로 하반신(下半身) 기능불능(機能不能)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배여사(裵女史)는 벼랑의 끄트머리에 선 것 같은 위기감(危機感)에 싸였다.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의 병간호(病看護)는 물론, 4남매(男妹)의 교육문제(敎育文題), 그리고 생계(生計)마저 자신(自身)의 힘으로 꾸려나가야 하는, 여자(女子)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곤경(困境)에 처(處)하고 보니, 처음에는 부질없이 자신(自身)의 불행(不幸)한 신세(身勢)를 한탄(恨歎)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여사(裵女史)는 거기서 좌절(挫折)하지 않고 일어나, 시모(媤母)님에 대한 각별(各別)한 치료(治療)와 봉양(奉養)은 물론, 2년(年) 가까이 남편(男便)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 내가며, 1.5km나 되는 한의원(漢醫院)에 리어카로 통원치료(通院治療)를 시키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 기울였다. 

막노동(勞動)을 비롯하여 남자(男子)도 하기 힘든 일들을 억척스럽게 해내며, 4남매(男妹)의 교육(敎育)도 소홀히 하지 않아 장남(長男)과 장녀(長女)는 중학교(中學校), 차남(次男)과 차녀(次女)는 국민학교(國民學校)에 다니고 있다. 

배여사(裵女史)의 이렇듯 지극(至極)한 정성(精誠) 덕택(德澤)에 지금은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 모두 지팡이를 짚고서나마 이웃 출입(出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숱한 고난(苦難)과 역경(逆境) 속에서도, 시모(媤母)님께 드린 지극(至極)한 효성(孝誠)과 남편(男便)에 바친 갸륵한 정성(精誠)은, 이웃 사람들을 감동(感動)시켜 칭찬(稱讚)과 격려(激勵)를 한 몸에 받고 있어 세인(世人)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