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황진숙(黃眞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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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대구 북구 읍내동
효녀(孝女) 황진숙(黃眞淑) 31세

황진숙(黃眞淑) 여사(女史)는 강원도(江原道) 명주군(溟州郡) 발한리(發翰里)라는 두메산골의 빈한(貧寒) 농가(農家)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원래 화전지대(火田地帶)인데다가 변변한 밭 한 뙈기도 가지지 못한 가정형편(家庭形便)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황여사(黃女史)는 이러한 가정형편(家庭形便)에도 불구(不拘)하고 어릴 때부터 남다른 효성심(孝誠心)으로 자랐다. 

어린 손으로 부모(父母)의 일을 도우면서도 공부를 계속(繼續)하여 근근(僅僅) 삼척여자상업학교(三陟女子商業學校)에까지 진학(進學)했으나 가계(家計)는 갈수록 어려워져, 부득이 2학년(學年) 때 중퇴(中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부터 실질적(實質的)인 가장(家長)이 된 황여사(黃女史)는, 어려운 가정(家庭)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집념(執念)으로 불철주야(不撤晝夜) 피나는 노력(努力)을 다했지만, 농토(農土) 하나 없는 산간벽지(山間僻地) 화전민(火田民) 살림은 점점 쪼들려만 갔다. 

생각다 못한 황여사(黃女史)는, 한 사람의 식솔(食率)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신(自身)이라도 시집을 가면 가정형편(家庭形便)이 좀 나아질까 하여, 18세(歲)의 어린 나이로 결혼(結婚)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전(前)부터 부친(父親)이 전신마비증세(全身痲痺症勢)를 보여 온 데다가 모친(母親)마저 중풍(中風)이 들어 눕게 되니, 그의 친정(親庭)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결혼후(結婚後) 대구시(大邱市) 북구(北區) 읍내동(邑內洞)의 현주소(現住所)로 옮겨와 살고 있던 황여사(黃女史)는, 친정(親庭)의 부모(父母)님과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날마다 고민(苦悶)하다가 마침내 친정식구(親庭食口)들을 데리고 와 자신(自身)이 보살피기로 결심(決心)하고 남편(男便)을 설득(說得)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가식구(媤家食口)도 아닌 친정식구(親庭食口)들을, 게다가 남의 집 셋방에 살고 있는 처지(處地)로서 남편(男便)이 선뜻 허락(許諾)하기는 만무(萬無)하였다. 

며칠 동안에 걸친 끈질긴 설득(說得) 끝에 남편(男便)의 허락(許諾)을 얻어 낸 황여사(黃女史)는, 지난 1977년(年)부터 친정(親庭)의 부모(父母)를 모셔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으나, 전신마비(全身痲痺)인 아버지와 중풍(中風)에 걸린 어머니를 남편(男便)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그것도 단간(單間) 세방(貰房)에서 모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여사(黃女史)는, 자신(自身)이 친정부모(親庭父母)를 모시며 살 수 있다는 그것 하나로 만족(滿足)하며, 매일(每日)같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병원(病院)을 찾아 다녔고, 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에 힘쓰면서 남편(男便)또한 알뜰히 섬기며 살아왔다. 

때때로 터져 나오는 남편(男便)의 반대(反對)와 성화(成火)를 견뎌야 했고, 또한 친정부모(親庭父母)님께는 그런 눈치를 그만큼 보이지 않고, 언제나 미소(微笑) 띤 얼굴로 대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란 도저히 말로 표현(表現)할 수가 없을 정도(程度)였다. 

황여사(黃女史)의 이러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을 본 이웃 주민(住民)들은, 그를 가리켜 "제이의 심청(第二의 沈淸)이라고 칭송(稱頌)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그 동안 밤낮없이 이맛살을 찌푸리던 남편(男便)도 그의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한 나머지, 이젠 오히려 따뜻한 말로 격려(激勵)를 해 주고, 또한 자신(自身)이 나서서 부모(父母)님을 더 잘 모시려고 노력(努力)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