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차정숙(車貞淑) 여사(女史)는 소시(少時)부터 효성(孝誠)이 남다른 바 있었는데, 17세(歲) 때 시모(媤母)님과 시(媤)동생이 둘 있는 빈한(貧寒)한 농가(農家)에 시집왔다.
당시(當時)의 시가(媤家)의 가족(家族)은 시모(媤母)와 남편(男便), 그리고 어린 시(媤)동생이었으며, 남의 논을 부쳐서 먹고 사는 어려운 살림에다가, 시가(媤家)는 의성김씨(義城金氏) 10대(代) 분맥(分脈) 종가(宗家)로서, 4대봉사(代奉祀)와 선조(先祖)의 묘사(墓祀)를 받들어야 하는 중책(重責)을 진 집안의 종부(宗婦)가 된 차여사(車女史)는, 그런 대로 신혼(新婚)의 몇 년간(年間)은 시모(媤母)님을 봉양(奉養)하면서 알뜰하게 살림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6.25 동란중(動亂中)에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하고, 그 이후(以後) 다 자란 맏아들(19歲)이 또한 병사(病死)하는 등, 불행(不幸)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차여사(車女史)의 고난(苦難)의 길은 시작되었다.
아들들과 장손(長孫)의 죽음으로 시모(媤母)님은 심장병(心臟病)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고, 남편(男便)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차여사(車女史)는, 이 환난(患難)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집안 일과 가족들의 생계(生計), 무엇보다도 시모(媤母)님의 간호(看護)에 전력(全力)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살림은 점점 더 궁색(窮塞)해져, 갔으나 차여사(車女史)는 실의(失意)에 빠지지 않고 시모(媤母)님의 건강회복(健康回復)을 위해 꾸준한 정성(精誠)을 기울이는 한편, 모든 집안 일들을 혼자서 처리(處理)해 나갔다.
특히 병환(病患)으로 음식(飮食)까지 부실(不實)한 시모(媤母)님을 위해, 매일같이 별도(別途)로 지은 "단지밥"과 고기반찬을 대접(待接)하였고, 비록 병중(病中)이긴 하지만 마음만이라도 편안(便安)에 해드리려고 갖은 정성(精誠)을 다해 모셨다.
10수년(數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시부(媤父)님의 묘소(墓所)를 찾아가서 시모(媤母)님의 건강회복(健康回復)을 기원(祈願)하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男便)과 자식(子息)을 잃은 슬픔과 시모(媤母)님의 병환(病患)으로 마음의 고통(苦痛)은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가중(加重)되었지만, 모든 어려움을 인내(忍耐)와 자제(自制)로 이겨나가면서 어려운 가사(家事)를 꾸려갔다.
생계비(生計費)와 시모(媤母)님의 약(藥)값 마련을 위하여 산나물을 캐어서 팔기도 하고, 남의 집 품삯일과 행상(行商), 심지어는 땔나무를 해서 팔기도 하였다.
며느리의 이러한 극진(極盡)한 효성(孝誠)으로, 시모(媤母)님은 70세(歲)를 넘긴 천수(天壽)를 다하였고,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하시자, 차여사(車女史)는 3년(年) 동안 초하루와 보름에 드리는 삭망전(朔望奠)을 묘소(墓所)에서 빠짐없이 지내는 등, 사후(死後)에 까지도 효행(孝行)을 다했다.
생전(生前)에 시모(媤母)께서 하신 "가계(家系)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에 따르기 위해 3년상(年喪)을 마친 후(後) 차여사(車女史)는 대구(大邱)로 이사(移徙)해 와 단간방(單間房)에서, 그는 행상(行商)을 하면서도 차남(次男)을 고등학교(高等學校)까지 교육(敎育)시켜 현재 은행원(銀行員)으로 일하고 있으니, 이 또한 시모(媤母)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궁행실천(躬行實踐)한 효심(孝心)의 발로(發露)라 하겠다.
- 이전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박옥분(朴玉粉) 25.05.19
- 다음글제25회 독행상(篤行賞) 황진숙(黃眞淑) 25.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