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박옥분(朴玉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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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대구 서구 내당동
효부(孝婦) 박옥분(朴玉粉) 46세

13년(年)이라는 기나 긴 세월(歲月)을, 한결같이 문밖 출입(出入)도 못하는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해 온 효부(孝婦)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옥분(朴玉粉) 여사(女史)이다. 

가난한 농부(農夫)의 아내로 시집을 온 박여사(朴女史)는, 평소(平素) 어려운 가정(家庭)살이를 탓하지 않고 시모(媤母)님께는 극진한 효성(孝誠)으로, 남편(男便)에게는 알뜰한 내조자(內助者)로 성실(誠實)하게 살아왔다. 

박여사(朴女史)의 시모(媤母)님이 신병(身病)을 얻고 고생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年)부터였다. 

시모(媤母)님께서 우연히 신병(身病)으로 자리에 눕자, 박여사(朴女史)는 더욱 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에 몰두(沒頭)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시모(媤母)님의 병환(病患)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가서, 발병(發病)한 지 10년(年)이 지난 1969년(年) 새해에 접어들면서는 바깥 출입(出入)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惡化)되었다. 이 때부터 박여사(朴女史)는 시모(媤母)님의 식사(食事)시중은 물론, 용변처리(用便處理)와 목욕(沐浴), 의복(衣服)이나 침구(寢具)의 세탁(洗濯) 등을 혼자서 도맡아 하게 되었다. 

건강(健康)한 노인(老人)들이 기거(起居)하는 방도 알게 모르게 냄새가 나게 마련인데,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야 하는 중환자(重患者)의 방은 악취(惡臭)가 얼마나 심(甚)했겠는가? 

동리(洞里) 사람들이 박여사(朴女史)의 집에 놀러 오기를 꺼릴 정도(程度)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박여사(朴女史)는 단 한번의 불평(不平)도 없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나 시모(媤母)님의 방을 드나들면서, 오늘까지 10수년(數年) 동안 극진(極盡)히 시중을 들어왔고, 또 항상 시모(媤母)님의 쾌유(快癒)를 간절히 빌어 왔다 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내린 효부(孝婦)라 아니 하리요. 

더우기 시모(媤母)님은 남다른 애주가(愛酒家)여서, 거의 매일(每日) 술을 사다가 대접(待接)해 왔고, 바깥 소식(消息)을 모르시는 답답함을 달래 드리기 위해, 하루에 몇 차례씩 집안 사정(事情)이나 그 외(外) 동리(洞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昭詳)하게 들려 드리곤 하였다. 

동리(洞里)에서 계(契)모임을 만들어 1년(年)에 한두 차례씩은 꼭 관광(觀光)을 떠나곤 하였지만, 그 때마다 박여사(朴女史)는 스스로 핑계를 대어 빠지고는, 오직 시모(媤母)님의 병간호(病看護)에만 전념(專念)하였다. 

혹 자신(自身)이 부득이하게 외출(外出)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꼭 손자(孫子), 손녀(孫女)들도 하여금 할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 놓고 볼 일을 보았고, 외출(外出)에서 돌아올 때는 언제나 시모(媤母)님이 좋아하시는 음식(飮食)을 사 들고 와서 드시게 하는 등, 시모(媤母)님에 대한 박여사(朴女史)의 이렇게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인근(隣近) 주민(住民)들한테서 늘 칭송(稱頌)받는 바 되고 있다. 

모름지기 부모(父母)모시기를 꺼리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한결 효(孝)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