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김원석(金元碩)

페이지 정보

본문

제25회(1982년 4월 13일)
독행상(篤行賞)
대구 동구 신천동
효부(孝婦) 김원석(金元碩) 46세

김원석(金元碩) 여사(女史)는 6.25 동란(動亂)이 끝난 지 몇 해 뒤에 1956년(年)에 결혼(結婚)하였는데, 그의 시가(媤家)에는 연로(年老)하신 시부모(媤父母)님과 전쟁중(戰爭中) 미망인(未亡人)이 된 남편(男便)의 형수(兄嫂) (손위 同壻)가 함께 살고 있었다. 

적은 농사(農事)를 지어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남편(男便)과 더불어 시부모(媤父母)님을 정성(精誠)껏 봉양(奉養)하는 가운데, 김여사(金女史)는 나름대로 행복(幸福)을 느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결혼(結婚)한 지 10년 후(年後)인 1966년(年), 남편(男便)의 갑작스러운 병사(病死)로 말미암아 김여사(金女史)와 그의 시가(媤家)는 고난(苦難)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때 그에게는 4명(名)의 자녀(子女)가 있었고, 더우기 10여년(餘年)사이에 아들 둘은 모두 잃어버린 슬픔과 충격(衝擊)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병석(病席)에 누워 오르지 그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시부모(媤父母)님이 계셨다. 

무엇보다도 시부모(媤父母)님의 몸과 마음을 편안(便安)케 해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김여사(金女史)는, 사랑방을 간이경로당(簡易敬老堂)으로 개조(改造)하여 시부(媤父)님과 마을의 노인(老人)들이 항상(恒常)모여 놀 수 있게 해 드렸다. 

그리고 나서 매일(每日)같이 간식(間食)을 마련하여 노인(老人)들을 대접(待接)하였는데, 살림이 어려울 때는 하다못해 삶은 고구마나 깎은 무라도 거른 적이 없었다. 

또한 김여사(金女史)는, 결혼초기(結婚初期)에 미망인(未亡人)이 된 손위 동서(同壻)를 10년(年)동안 시부모(媤父母)님과 마찬가지로 극진(極盡)히 모셔 오다가, 그와 친척(親戚)들을 설득(說得)하여 개가(改嫁)를 시켜 새로운 삶을 얻게 해 주었다. 그 후(後), 언제 병석(病席)에 누우시게 될지 모르는 시부모(媤父母)님을 위해서, 또 커가는 자녀(子女)들을 교육(敎育)을 위해서, 김여사(金女史)는, 고향(故鄕)을 떠나 대구(大邱)로 이주(移住)해 왔다. 

전답(田畓)을 판 돈으로는 집 한 칸 장만하기에도 빠듯했으니, 대구(大邱)로 온 그날부터 생계비(生計費)를 벌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낮에는 막노동(勞動)과 가내공업체(家內功業體) 종업원(從業員)으로, 밤에는 삯바느질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어려운 가계(家計)를 꾸려나가는 한편, 시부모(媤父母)님의 봉양(奉養)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향(故鄕)에 있을 당시(當時), 환절기(換節期)마다 기르던 염소를 잡아 시부모(媤父母)님을 보신(補身)케 해 드렸던 일을, 대구(大邱)에 와서는 매년(每年) 계속(繼續)해 드렸다. 

또한 김여사(金女史)는 꼭 자신(自身)이 벌어 온 수입금(收入金)을 송두리째 시부(媤父)님께 맡겨다가 다시 생활비(生活費)를 타서 쓰고 있으며, 시모(媤母)님의 생신(生辰)일과 몇 년전(年前) 오랜 노환(老患) 끝에 별세(別世)하신 시모(媤母)님의 기제일(忌祭日)에는, 해마다 이웃 노인(老人)들을 초청(招請)하여 따뜻한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고 있다. 

그리고 인근(隣近) 경로당(敬老堂)에도 종종 찾아가서 손수 음식(飮食)과 다과(茶菓)를 대접(待接)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은 비단 집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편, 시부(媤父)님의 그 며느리에 대한 사랑 또한 끔찍하여, 지난 1979년(年) 봄에는, 별도(別途)로, 저축(貯蓄)한 돈 삼만(參萬)원을 시부(媤父)님께 드리면서, 평소(平素) 가고 싶어 하시던 고향(故鄕)에 다녀오시도록 했으나, 시부(媤父)님은 오히려 그 돈으로 보약(補藥)을 구(求)해와서 자부(子婦)에게 먹게 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웃 사람들은 구부간(舅婦間)의 정(情)에 감동(感動)하였다고 한다. 

김여사(金女史)의 이러한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인근(隣近)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송(稱頌)받은 바 되고 있으며 10년(年)전(前)에는 청송군(靑松郡) 현동면장(縣東面長)으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