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박정경(朴正京)

페이지 정보

본문

제25회(1982년 4월 13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고령군 개진면
효부(孝婦) 박정경(朴正京) 53세

박정경 여사는 6.25 동란 당시 공산군의 총검 앞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을 잃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해 온 출천(出天)지효부이다. 

도덕규범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박여사는 어려서부터 품행이 남달라, 원근의 칭송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17세의 나이로 결혼한 그는, 신혼의 단꿈도 깨기 전에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맞게 되었다. 

당시 한청단장(韓靑團長)으로 일하고 있던 남편은, 부득이 후퇴하는 국군과 함께 먼저 피란 할 수밖에 없었고, 박여사는 남아서 시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일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시모님은 오지(奧地)에 살고 있던 자신의 친정에 모셔다 놓았으나, 한청단장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받을 지도 모르는 시부님을 위해서는 더욱 안전한 피란처를 찾아야 했다. 

병환중인 시부님을 등에 업고 박여사가 달려간 곳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의 움막이었다. 

그날부터 밤에만 연기를 내어 죽을 끓여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한 극진한 봉양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으나, 시부님의 병환은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며칠 후엔 설사병까지 겹치게 되었다. 

음식조차 구하기 어려운 산중에서 매일 세탁을 해서 옷을 갈아 입혀 드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거니와 갈아입을 옷이 아예 없었으니 그 어려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무인지경인 산중에 난데없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시부님의 용변처리를 도맡아 해 주시 시작했는데, 천우신조란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리라.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그 악독한 북괴군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총칼로 위협을 하면서 개를 끌어가려고 했다. 박여사는 딱한 사정을 눈물로 호소하였으나 무지막지한 북괴군들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총부리를 그의 가슴에 들이댔다. 그러자 박여사는 가슴을 내밀고 다가서면서 “쏠테면 쏴라. 이놈들아. 너희들은 부모님도 없느냐”고 울부짖으며 반항을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마침내 북괴군들은 박여사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을 했는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 이후로 시부님의 병환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갔으나, 그 동안 도와 주었던 그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여 드리는 등 그의 더욱 극진한 효성으로 시부님은 드디어 건강을 회복하였다.   

끔찍스러웠던 전쟁도 휴전이 되어 박여사 일가는 다시 고향을 찾아 살게 되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한편, 효성을 다하면서 살아온 박여사에게 또다시 고난이 닥친 것은 1977년 이었다. 그 해 3월부터 시부님이 중풍으로 몸져 눕게 되어, 백방으로 동분서주, 구약·간병에 전심전력하면서, 또한 어려운 가사까지 돌보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남편마저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여 대구모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여사는 밤에는 시부님을 위해 극진히 병간호를 하면서 낮에는 다시 병원으로 달려가 남편을 지성껏 보살폈는데, 매일같이 80리길을 왕래하면서 두 사람을 간호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5개월간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끝내 타계하고야 말았고, 이로 인하여 시부님은 상심병까지 겹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끝내는 기동도 못하게 되어 식음마저 남의 손을 빌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박여사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가슴 속에만 묻어 둔 채, 시부님의 식사시봉은 물론 대소변까지도 일일이 받아내야 했으며, 거기다가 시모님마저 노망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단 한 번의 짜증이나 난색함이 없이 언제나 웃음과 자애심으로 정성을 다하니, 이 어찌 출천지효부(出天之孝婦)라 하지 않겠는가. 

시부께서는 성품이 급하여, 그 전에 어린 손녀가 저지른 장난이 농사일에 장해가 된다고 손녀를 내던져 끝내 불구자를 만들고 만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박여사는 시부님의 마음이 상하실까 두려워 즉시 딸을 외가로 보내어 치료토록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딸을 조부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적당한 구실로 속여가며 지내고 있다.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때문에 병신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박여사는 “그래선 안 된다. 당신 때문에 손녀가 병신이 됐다면 얼마나 낙심하고 상심하시겠느냐?”며 그들의 권유를 뿌리쳤다. 

박여사의 나이 육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시부님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고, 순종하면서 어려운 가계를 혼자 힘으로 꾸려나오고 있으니, 이러한 박여사의 행적이야말로 만인의 귀감이요, 모든 여성의 사표가 될 것이다. 

박여사의 숨은 공덕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면서, 박여사 자신의 거부와 사양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유림회 경북지부장을 비롯하여, 향교유도회장, 고령문화원장, 양우회장 등으로부터 효부표창을 받은 바 있고, 향리에서는 환영의 큰 잔치가 여러 차례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도 박정경 여사는 96세의 시부님과 90세의 시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충·효·예를 가훈으로 삼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