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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문영씨(郭文永氏)는 6.25 동란(動亂) 때 군(軍)에 입대(入隊)하여 정보기관(情報機關)에서 5년간(年間) 성실히 근무(勤務)하고, 제대 후(除隊後)에는 고향(故鄕)에서 동장(洞長)과 동농협조합장직(洞農協組合長職)을 역임(歷任)하면서, 백년호(百年戶) 동민(洞民)의 누적된 씨족간(氏族間)의 불화(不和)와 갈등(葛藤) 등, 불신사조(不信思潮)를 해소시키면서 전동민(全洞民)의 화합분위기(和合雰圍氣)를 조성(造成)하는데 온갖 정열(情熱)을 기울여 왔다.
또한 지성개발사업(地城開發事業)에도 솔선수범(率先垂範)하면서 농가부업(農家副業)으로 가마니짜기와 새끼꼬기를 적극권장(積極勸奬)하여 마침내 농가부업(農家副業) 우수시범동(優秀示範洞)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또한 곽씨(郭氏)는 마을의 청소년(靑少年)들을 수시로 자기(自己)의 사랑방에 모아놓고 정서교육(情緖敎育) 등을 실시(實施)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다른 마을 청소년(靑少年)들에 비(比)해 남달리 근면(勤勉)·자조(自助)·자립정신(自立精神)이 함양되기도 했다.
그는 슬하(膝下)에 2남(男) 3녀(女)를 둔 다복(多福)한 가장(家長)으로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많은 정열(情熱)을 쏟아 왔는데, 특히 자녀(子女)들이 출타시(出他時)에는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을 철저히 이행(履行)토록 해서 부자자효(父慈子孝)의 건전(健全)한 가풍(家風)을 조성(造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年)에는 서울에 출가(出家)한 딸이 신혼생활(新婚生活) 수개월후(數個月後)에 불행(不幸)하게도 신장염(腎臟炎)으로 입원(入院)하게 됐는데, 콩팥을 이식(移植)하지 않으면 생명(生命)이 위독(危篤)하다는 급보(急報)에, 친정(親庭)아버지인 그가 자진(自進)해서 딸에게 콩팥을 제공(提供)해서 딸의 생명(生命)을 구(救)해 주기도 하여, 숭고(崇高)한 아버이의 희생적(犧牲的) 자식(子息) 사랑의 정(情)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식수술(移植手術)을 며칠 앞둔 당시(當時)에 주위(周圍)에서는 말도 많았다.
"아니 그래, 50대(代) 가장(家長)으로 자식(子息)도 아닌 출가(出嫁)한 여식(女息)에게 자신(自身)의 생사(生死)를 무릅쓰고 콩팥을 떼어 주다니................"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미 시집갔으면 남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자신(自身)의 목숨인 콩팥을 떼어 주다니?" 등등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지만 그는, "비록 딸이 출가(出嫁)했다 해도 나의 핏줄인 내 여식(女息)이다."라고 말하면서 끝내 이식수술(移植手術)에 쾌(快)히 응(應)했던 것이다.
막상 모든 이식수술(移植手術)이 끝나고, 딸이나 그의 아버지인 곽씨(郭氏) 모두가 건강(健康)을 되찾고 정상적(正常的)인 활동(活動)을 하게 되자, 이번에는 원망(怨望)이나 충고(忠告) 대신 많은 찬사(讚辭)가 날아 왔다.
특히 콩팥 이식수술 후(移植手術後) 부녀(父女)가 모두 건강(健康)을 되찾았다는 소식(消息)에 동민(洞民)들도 감동(感動)한 나머지, 정성(精誠)을 모아 서울의 병원(病院)까지 동민(洞民) 대표자(代表者)들이 찾아가 완쾌(完快)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하였다.
그런데 곽씨(郭氏)의 효도관(孝道觀) 또한 철저(徹底)하기만 했다.
"부모(父母)에 대한 자식(子息)의 공경(恭敬)과 효성(孝誠)이 본능적(本能的)이며 무조건(無條件)의 것이라면, 자식(子息)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도 당연히 본능적(本能的)이며 무조건(無條件)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경애사상(敬愛思想)이 그로 하여금 출가(出嫁)한 딸에게 콩팥에서 기꺼이 떼어 주는 인간애(人間愛)를 지니게 했는지도 모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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