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허화선(許華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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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예천군 보문면
열부(烈婦) 허화선(許華仙) 36세

하루가 다르게 도덕관념(道德觀念)과 예의범절(禮儀凡節)이 땅에 떨어져 가고 있는 이 때, 온갖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의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오직 성실(誠實)과 인내(忍耐)로써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길을 말없이 걸어가고 있는 풍형적(豊型的)인 한국(韓國)의 여인상(女人像)이 있으니, 그가 바로 예천군수(醴泉郡守)의 표창장(表彰狀)과 학구단위(學區單位) 노인회장(老人會長)의 표창장(表彰狀)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는 허화선(許華仙) 여사(女史)이다. 

그의 남편(男便)은 첫돌 전(前)에 부친(父親)을, 그리고 두 돌 때는 모친(母親)과 사별(死別)하고 고아(孤兒)아닌 고아(孤兒)가 된 채 종백수(從伯父) 집에서 눈치밥을 먹고 살아온 불쌍한 사람이었다. 

허여사(許女史)가 결혼(結婚)한 후(後) 이들 부부(夫婦)는 "잉꼬 부부(夫婦)"라 는 말을 들을 만큼 행복(幸福)된 나날을 보내다가 광산촌(鑛山村)으로 이주(移住)했다. 

그런데 불행(不幸)은 이 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곧 그의 남편(男便)이 취업(就業) 3일(日)만에 갱(坑) 속에서 작업(作業)을 마치고 궤도차(軌道車)로 퇴근(退勤)하던 중,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로 깔리는 바람에 하반신불구(下半身不具)가 됐기 때문이었다. 

하반신(下半身)을 못쓰게 된 탓으로 부부생활(夫婦生活)은 말할 것도 없지만 하루 24시간(時間)을 꼬박 누워 있어야만 하는 딱한 처지(處地) 속에 생계(生計)까지 막연(漠然)하게 되었다. 

가까스로 받아낸 350만(萬)원의 보상금(報償金)으로 입원비(入院費)등을 제(除)하고 나니 남은 돈은 100(萬)원뿐이었다. 

허여사(許女史)는 남편(男便)과 의논 끝에 고향(故鄕)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나, 방(房) 한 간(間) 없는 고향(故鄕)은 이들에게 절망(絶望)만 안겨줄 뿐이었다. 

이런 딱한 사정(事情)을 보다 못한 친지(親知)와 동민(洞民)들이 허여사(許女史)의 갸륵한 열행(烈行)에 감동(感動)하여 이들이 안주(安住)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주었고, 남은 돈으로는 1,000여평(餘坪)의 농토(農土)도 매입(買入)하였다. 

그 때부터 허여사(許女史)는 힘겹게 농토(農土)를 가꾸는 한편 동네의 궂은 일과 품삯일을 하면서 남편(男便)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냈고, 특(特)히 남에게 추(醜)한 꼴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세면(洗面), 이발(理髮), 심지어 손톱과 발톱에 이르기까지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을 만큼 지성(至誠)으로 시봉(侍奉)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꼬박 누워서 생활(生活)해야 하는 탓으로 동창과 복통(腹痛) 등 갖가지 부수된 상병(傷病)이 빈발(頻發)하여 이를 치료(治療)키 위해 병원(病院)에 가야만 했는데, 이 때도 버스길이 막힐 때는 남편(男便)을 등에 업고 읍내(邑內)까지 다녀오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눈물겹기만 하였다. 

이러한 역경(逆境) 속에서도 치료비(治療費)와 생계(生計)에 보탬이 될까 해서 보따리 행상(行商)길에 나서 기도했으나 여의(如意)치 않았고, 3년(年)동안 계속(繼續)이어진 가뭄으로 농사(農事)마저 흉년(凶年)이 들어, 하는 수 없이 부채(負債)를 갚기 위해 농토(農土)를 처분(處分)해야 하는 딱한 처지(處地)에까지 도달(到達)하였다. 

지금은 행정당국(行政當局)의 배려(配慮)로 생활보호대상자(生活保護對象者)가 되어 겨우 연명(延命)해 가고 있지만, 남편(男便)을 위한 그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야화(野話)와 전설(傳說)속에 나오는 여인(女人)처럼, 그야말로 현대(現代)에서는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힘든 열부(烈夫)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