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배순조(裵順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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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덕군 달산면
열부(烈婦) 배순조(裵順兆 44세

한말(韓末) 감오경장(甲午更張)의 개혁(改革) 법령중(法令中)에는 조혼(早婚)을 금지(禁止)한 조항(條項)이 들어있었다. 

내용(內容)인 즉 남자(男子)는 20세(歲), 그리고 여자(女子)는 16세(歲)가 하한선(下限線)으로 되어 있었다. 

16세(歲)의 어린 나이에 오영재씨(吳永在氏)와 결혼(結婚)을 한 배순조(裵順兆) 여사(女史)도 예(例)의 조혼(早婚)을 한 비극적(悲劇的)인 여성(女性)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여사(裵女史)의 남편(男便)은 광산(鑛山)에서 일하는 광부(鑛夫)였고 산(山)비탈에 있는 1,000여평(餘坪)의 밭이 그의 전재산(全財産)이었다. 

배여사(裵女史)는 그런 대로 농토(農土)를 가꾸면서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내오던 중, 그러니까 그 때가 1968년(年) 7월(月)이었다. 광산(鑛山)에서 일하던 남편(男便)이 갑자기 갱내(坑內)가 무너지는 바람에 척추(脊椎)를 크게 다치고 4년(年)동안이란 긴 세월(歲月)을 병원(病院)에 드나들며 통원치료(通院治療)를 했지만 별다른 진전(進展)없이 퇴원(退院)했다. 따라서 배여사(裵女史)는 그 날부터 농사(農事)도 짓고 자녀(子女)들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했다. 

남편(男便)은 꼬박 누워서 지내야 하는 환자(患者)였기에 용변처리(用便處理)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밥도 한 술 두 술씩 떠먹여 주어야만 했는데, 이와 같은 생활(生活)의 연속(連續)이 자그마치 15년(年)이란 긴 세월(歲月)동안이나 되었으니, 배여사(裵女史)가 그 동안 얼마나 고생(苦生)했다는 것은 필설(筆舌)로는 다 표현(表現)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이랴, 병(病)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수십리(數十里), 수백리(數百里) 길을 백방(百方)으로 헤매면서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하는 등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은 누가 보아도 감탄사(感歎詞)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와 같이 남편(男便)을 위해 극진히 간병(看病)에 온갖 정성(精誠)을 쏟았으나, 아내의 따뜻한 정성(精誠)의 보람도 없이 조금도 차도(差度)를 보지 못하고 가계(家計)는 점점 더 기울어져 파탄(파탄(破綻)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약(弱)해지면 안 된다. 이보다 더한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이 들이닥쳐도 싸워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행(多幸)히 직장(職場)으로부터 보상(補償)으로 받은, 논 2,000평(坪)과 발 1,000평(坪)이 구세주(救世主) 역할(役割)을 해서 끼니 걱정은 없어졌지만,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어려운 농사(農事)일을 꾸려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求)하기 위해 산(山)을 헤매는 등 여가장(女家長)이 해야 할 일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남편(男便)의 식사(食事)시중과 용변처리(用便處理), 이 밖에도 자질구레한 간호(看護)의 손길로 환자(患者)를 불편(不便)없이 도와 주었으나, 남편(男便)의 병세(病勢)는 제자리를 맴돌며 배여사(裵女史)의 마음만을 괴롭혔다. 

이와 같은 어려운 와중(渦中)에서도 1남(男) 2녀(女)의 자녀(子女)를 훌륭하게 키워, 장남(長男)은 전문대학(專門大學)까지 졸업(卒業)토록 하였고, 딸들도 중학(中學)을 마치게 하는 등 어려운 고난(苦難) 속에서도 어머니의 사명(使命)을 다해 왔다. 

생활(生活)이 다소(多少) 안정(安定)된 지금에 와서는 자신(自身)이 겪어 온 쓰라린 과거(過去)를 생각하면서, 주변(周邊)의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이웃을 도와 주고 있어,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찬사(讚辭)가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