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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金永愛) 여사(女史)는 비록 막 노동(勞動)을 하는 남편(男便)과 쪼들리는 가난 속에서 살아오긴 했지만, 슬하(膝下)의 자녀(子女)와 더불어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불행(不幸)의 여신(女神)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젊은 나이에 남편(男便)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진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김여사(金女史)는 고행(苦行)길을 걸어가야 하는 어려운 시련(試鍊)과 역경(逆境)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성품(性品)으로 남편(男便)을 극진히 간호(看護)하면서 허덕이는 생활(生活)도 차분하게 꾸려 나갔다.
무엇보다 김여사(金女史)는 항상(恒常) 웃는 얼굴로 이웃과의 화목(和睦)도 유지(維持)하여 왔는데, 그 분위기(雰圍氣)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 더욱 굳센 의지력(意志力)으로 역경(逆境)과 싸워 이겨 나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年後)인 1979년(年) 11월(月)에 김여사(金女史)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역경(逆境)이 그의 앞에 가로 놓였는데, 그것은 곧 장남(長男)의 교통사고(交通事故)였다.
뇌(腦)에 큰 상처(傷處)를 당(當)한 큰아들은 몇 달 동안 입원(入院)해서 치료(治療)해 보았지만, 뇌(腦)의 기능(機能)은 정상화(正常化)시키지 못한 채 퇴원(退院)하고 말았다.
따라서 김여사(金女史)는 중풍(中風)의 남편(男便)을 돌보는 한편, 식물인간(植物人間)에 가까운 아들의 병간호(病看護)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대구(大邱), 안동(安東), 영주(榮州) 등 병원(病院)과 한의원(漢醫院) 간판(看板)이 붙어 있는 곳은 모두 찾아 다니면서, 아들의 병(病)을 고쳐 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모두가 헛수고(手苦)였고, 끝내 어머니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그의 아들은 발병(發病) 2년(年)만에 눈을 감아 버렸다.
'내 운명(運命)이 왜 이다지도 기구(崎嶇)할까? 그렇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男便)만은 꼭 살려야 한다. 남편(男便)마저 제물(祭物)로 받칠 순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을 굳게 다짐한 김여사(金女史)는, 이제 눈물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 죽은 아들에게 못다한 간호(看護)의 손길을 남편(男便)에게 쏟았다.
병(病)든 환자(患者)는 대개가 다 그러하듯이, 그의 남편(男便)도 때때로 신경(神經)을 바늘 끝처럼 곤두세우면서,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며 김여사(金女史)에게 공격(攻擊)의 화살을 퍼부었지만, 그럴 때마다 김여사(金女史)는 상냥한 미소(微笑)로 남편(男便)의 노여움을 막으면서 남편(男便)이 원(願)하는 그대로 모든 것을 충족(充足)시켜 주었다.
그러자 남편(男便)은 마치 온순(溫順)한 양(羊)처럼 두 번 다시는 김여사(金女史)를 괴롭히지 않았다.
김여사(金女史)는 물리치료(物理治療)의 한 수단(手段)으로 기동(起動)이 불편한 남편(男便)에게 매일같이 걸음마 운동(運動)을 시키기도 하고, 보건체조(保健體操)로 그의 기능(機能)을 회복(回復)시켜 보려고 노력(努力)도 했지만, 남편(男便)의 중풍증세(中風症勢)는 고개를 수그릴 줄 모르고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간호(看護)의 손길을 늦추는 김여사(金女史)가 아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극진히 보살폈다.
'두고 보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남편(男便)의 건강(健康)을 회복(回復)시키고야 말겠어.' 김여사(金女史)의 끈덕진 집념(執念)으로 부군(夫君)의 건강(健康)도 멀지 않아 회복(回復)되리라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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