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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자(張花子) 여사(女史)는 그의 나이 18세(歲)때, 심산유곡(深山幽谷)인 안동군(安東郡) 풍천면(豊川面) 어담동 산골로 시집을 갔다.
그와 결혼(結婚)한 남편(男便)은 갈대를 연상(聯想)하리만큼 몸이 수척했고, 게다가 땅 한 평(坪)도 소유(所有)하지 못하고 있는 가난뱅이였다.
이럴 바엔 굳이 농촌(農村)에서 살 필요(必要)가 없다고 생각한 장여사(張女史)는, 남편(男便)을 설득(說得)시켜 안동시내(安東市內)로 이사(移徙)를 하였다.
산(山)비탈 구석진 곳에 단간(單間) 세방(貰房)을 얻고, 남편(男便)은 손에 닥치는 대로 잡노동(雜勞動)을, 그리고 그 녀(女)는 남의 집 빨래와 잔칫집 뒷바라지 등으로 겨우 생계(生計)를 이어갔는데, 뜻하지 않은 불행(不幸)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평소(平素)부터 위(胃)가 나빠서 고생하던 남편(男便)이 결핵병(結核病)까지 겹쳐 자리에 눕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 날부터 장여사(張女史)의 지극(至極)한 간병(看病)이 시작됐지만 남편(男便)의 병(病)은 더욱 악화(惡化)되어 갈 뿐이었다.
그때 이미 그에게는 슬하(膝下)에 4남매(男妹)의 자녀(子女)까지 두어 생계(生計)의 위협(威脅)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가중(加重)되어 갔다.
그 동안 푼푼이 모은 돈으로 손바닥 만한 5평(坪)짜리 집까지 마련했는데, 차마 그것마저 쌀과 바꾸어 먹을 수는 없어서, 밤이나 낮이나 더욱 열심(熱心)히 땀 흘려 일하면서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편(男便)의 구환(救患)을 위해 전심전력(全心全力)했다.
위장병(胃腸病)과 결핵병(結核病)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는가 하면, 때로는 매일(每日)같이 복용(服用)해야 하는 약(藥)값이 떨어져 남몰래 눈물 지으면서 울기도 했다 한다.
남편(男便)이 신음(呻吟)하면서 각혈(咯血)을 할 때마다 그는, 자녀(子女)들은 모두 밖으로 내 보내고 꼬박 지켜 앉아서 남편(男便)의 고통(苦痛)을 자기(自己)의 고통(苦痛)으로 받아들이면서 남편(男便)이 괴로움을 달래 주었다.
"여보 당신은 살 수 있어요 조금도 낙심(落心)하지 말고 용기(勇氣)를 내어서 병(病)과 싸워 이겨야 해요, 알아들었죠?" 제 말씀."
그러나, 그 녀(女)의 애절(哀切)한 간병(看病)의 보람도 없이 그의 남편(男便)은 1969년(年) 1월(月), 그의 아내와 자녀(子女) 4명(名)을 남겨 놓고 영면(永眠)하고 말았다.
장여사(張女史)는 남편(男便)이 별세(別世)하자, 앞으로 네 자녀(子女)를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漠漠)하기만 하여, 한탄과 절망(絶望)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때로는 죽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룰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안 된다. 자식(子息)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해. 그것이 남편(男便)을 기쁘게 하는 길이야.' 꿋꿋하게 살기로 다시 굳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女)는, 더욱 힘을 내어 열심히 일을 하였다.
보따리 행상(行商)으로 생계(生計)를 메꿔 가고 있는 장여사(張女史)는, 이제 자녀(子女) 모두가 국민학교(國民學校), 중학교(中學校), 고등학교(高等學校)로 줄줄이 이을 정도인데 저마다 공부(工夫)에 열중(熱中)하고 있고, 보따리장수를 하고 있는 장여사(張女史)도 저금통장(貯金通帳)을 가질 만큼, 그의 행복(幸福)도 지금부터 싹이 트고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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