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곽성자(郭星子)

페이지 정보

본문

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수성구 파동
열부(烈婦) 곽성자(郭星子) 39세

곽성자(郭星子) 여사(女史)의 결혼생활(結婚生活)은 불과(不過) 9개월(個月)만에 끝날 만큼, 남편(男便)은 살아있되 죽은 거나 다름없는 비극(悲劇) 속에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런 대로 달콤한 행복(幸福)을 꿈꾸면서 신혼생활(新婚生活)을 이어오던 1967년(年) 8월(月) 어느 날, 그의 남편(男便)은 불의(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좌측하지(左側下肢)가 절단(折斷)되고 끝내 식물인간(植物人間)처럼 목침대(木寢台)에 꼬박 누워 있어야만 했다. 

당시(當時) 곽여사(郭女史)의 나이는 청춘(靑春)의 절정기(絶頂期)라고 할 수 있는 24세(歲)였다. 

침대(寢臺)에 눕게 된 그날부터 곽여사(郭女史)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가 뒤따랐다. 

매일같이 몇 차례에 걸친 용변처리(用便處理)에서부터 밥을 먹여 주는 잔심부름에 이르기까지,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70고령(高齡)을 넘어서 시부모(媤父母)도 정성(精誠)을 다해 봉양(奉養)했다. 

과부(寡婦)아닌 생과부(生寡婦)가 되어 청춘(靑春)과 인생(人生)을 희생(犧牲)시키고 있는 며느리의 딱한 현실(現實)을 보다못해 그의 시부모(媤父母)님도, 

"아가야, 네가 고생(苦生)하는 걸 보니 안타까와 죽겠구나........, 모든 것을 훨훨 털어 버리고 네 행복(幸福)을 위해서 새 삶을 찾도록 해라." 

이와 같이 개가(改嫁)하라는 뜻을 비쳤지만 그의 결심(決心)은 단호(斷乎)했다. 

"아버님 저는 이 집안의 며느리가 아니라 딸입니다. 어째서 아버님의 핏줄인 딸을 쫓아 버리려고 하십니까? 저는 아들과 결혼(結婚)한 그 날부터 이 집안의 귀신(鬼神)이 되기로 맹세(盟誓)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말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대답(對答)하는 며느리의 말에 그의 시부모(媤父母)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부터 곽여사(郭女史)는 더욱 남편(男便)과 시부모(媤父母)님을 알뜰히 봉양(奉養)하면서 4명(名)의 생계(生計)를 위해 직장(職場)에 나가서 일을 했다. 

침대(寢臺)에 누워서 꼼짝달싹도 못하는 남편(男便)을 뒷바라지해 온 지도 어언 17년(年), 기나긴 세월(歲月)이 흘렀지만 그 녀(女)는 불평(不平) 한 마디 없이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섬기면서 살아왔다. 

그 사이에 70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도, 신경통(神經痛)과 관절염(關節炎)으로 눕게 되어 그 녀(女)는 두 사람의 환자(患者)를 돌봐야만 했다. 

따라서 공장(工場)에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남편(男便)의 뒤치닥거리와 시모(媤母)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고역(苦役)이 그의 두 어깨를 간단(間斷)없이 짓눌렀지만, 그의 인자(仁慈)한 마음씨는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았다. 

"곽여사(郭女史)는 살아있는 백의(白衣)의 천사(天使)입니다. 병(病)든 남편(男便)을 위해 자기희생(自己犧牲)을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동민(洞民)의 말과 같이 곽여사(郭女史)는 자기(自己)를 십자가(十字架)에 올려놓은 거룩한 봉사자(奉仕者)였고,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였다. 

17년(年)이란 기나 긴 세월(歲月)을 하루같이 남편(男便)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받쳐온 곽여사(郭女史), 고귀(高貴)한 그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값진 교훈(敎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