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박노연(朴魯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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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이곡동
효부(孝婦) 박노연(朴魯連) 46세

가정(家庭)에서는 인정(人情) 많은 주부간호원(主婦看護員)으로, 그리고 직장(職場)인 학교(學校)에서는 어진 선생(先生)님으로 이름이 알려진 현모양처(賢母良妻)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노연(朴魯連) 여사(女史)이다. 

그가 걸어온 행적(行績)을 살펴보면, 유학자(儒學者)인 시조부(媤祖父)님을 찾아오시는 손님을 위하여 항상(恒常) 바쁜 접대(接待)의 손길을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1962년(年) 3월(月) 시조부(媤祖父)님께서 중풍(中風)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됐을 때도 시간(時間) 틈틈이 입원(入院)한 병실(病室)을 찾아가 손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기도 했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중풍(中風)에 좋다는 명약(名藥)을 구(求)해다 복용(服用)토록 했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인 듯 발병(發病) 9년(年)만에 별세(別世)하시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2개월후(個月後)에 이번에는 시부(媤父)님이 간경화증(肝經化症)으로 다시 병원(病院)에 입원(入院)하는 연속적(連續的)인 불운(不運)을 맞게 되었다. 

그 때도 박여사(朴女史)는 시부(媤父)님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하는 한편,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구(求)하기 위해 주말(週末)마다 깊은 산(山)골짝을 헤매었고 시부(媤父)님이 하루 속(速)히 완쾌(完快)되기를 간곡히 빌기도 했지만, 4년후(年後)에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 해가 바로 1972년(年)이었다. 이제는 겨우 눈물이 마르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시모(媤母)님께서 유방암(乳房癌)으로 입원(入院)하게 돼 박여사(朴女史)의 아픈 마음을 또 한번 울렸다. 

그 해가 바로 1973년(年)이었는데, 지성(至誠)으로 간호(看護)하고 구환(救患)에 전력(全力)했지만 끝내 2년후(年後)인 1975년(年)에 세상(世上)을 뜨시고 말았다. 

이와 같이 비극(悲劇)의 꼬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박여사(朴女史)의 표정(表情)은 예나 이제나 효성(孝誠)으로 끝날 만큼 한결같았다. 

지극(至極)한 그의 효성(孝誠)에 마을 사람들은, "환자(患者) 치닥거리만 해도 벌써 몇 사람째입니까? 자그마치 15년간(年間)에 걸쳐 묵묵히 구환(救患)에만 힘써온 박여사(朴女史)는, 대구(大邱)가 낳은 나이팅게일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은 아닙니다."라고까지 하였다. 

박여사(朴女史)의 고행(苦行)은 어디 그뿐이랴, 남편(男便)과 자식(子息)들과 며느리를 잇달아 잃어버린 슬픔에, 이번에는 시조모(媤祖母)님께서 음식(飮食)을 전폐(全廢)하고 바깥 출입(出入)도 안하는 것이었다. 박여사(朴女史)는 생각 끝에 주말(週末)마다 달성공원(達城公園)과 동촌유원지(東村遊園地) 등 야외(野外)로 모시고 다니면서 시조모(媤祖母)님의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 드렸다. 

그런데 이 또한 무슨 운명(運命)일까. 이번에는 군(軍)에서 제대(除隊)한 시(媤)동생이 정신병원(精神病院)에 입원(入院)하게 되었다. 

매월(每月) 치료비조(治療費條)로 10만(萬)원씩 지불(支拂)해야 하는 등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을 정도(程度)로 그가 걸어온 반평생(半平生)은 한없이 고된 병(病)구완 뿐이었다.

유도회(儒道會) 대구시위원장(大邱市委員長)으로부터 효부표창(孝婦表彰)을 받기도 한 박여사(朴女史)는, 대구(大邱)가 낳은 출천지(出天之) 효부(孝婦)이자 현모양처(賢母良妻)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