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박규월(朴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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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봉화군 명호면
효부(孝婦) 박규월(朴圭月) 44세

박규월(朴圭月) 여사(女史)는 불치(不治)의 병(病)으로 5년전(年前)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후, 오늘도 5남매(男妹)의 장(壯)한 어머니로서 또한 극진(極盡)한 부부(夫婦)로서 맡은 바 그의 사명(使命)을 다하고 있는 농촌여성(農村女性)이다. 

특히 박여사(朴女史)는 노환(老患)으로 문밖 출입(出入)도 못하는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해 오고 있는데, 병환(病患)이 더할 때는 신약국(新藥局)과 한약방(漢藥房)을 부지런히 번갈아 돌아다니면서 약(藥)을 구(求)해다가 복용(服用)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심심산곡(深深山谷)을 헤매다가 길을 잃고 산중(山中)에서 노숙(露宿)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닐 만큼, 시부모(媤父母)님을 위하는 그의 효심(孝心)은 지극하였다. 

박여사(朴女史)는 비단 그가 모시고 있는 시부모(媤父母)에게만 효성(孝誠)을 다 바쳐 극진히 봉양(奉養)해 온 것이 아니라, 마을 노인(老人)들에 대(對)해서도 마을을 대표(代表)하는 효부(孝婦)란 말을 들을 만큼 그가 지난 따뜻한 효심(孝心)을 아낌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 좋은 예(例)의 하나로는, 매월(每月) 정기적(定期的)으로 경로당(敬老堂)뿐만 아니라 불우(不遇)한 이웃에게도 메아리쳤다. 

이제 마을에서는 그를 보고 '봉사왕(奉仕王)'이라고 호칭(呼稱)할 정도로, 그의 인간애(人間愛)에 대해서 깊은 경의(敬意)를 표(表)하고 있다. 

그 자신(自身) 다섯 자녀(子女)에다 노환(老患)의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해야 하는 어려운 살림임에도 불구(不拘)하고, 자식(子息)들에게는 항상, 

"나보다 이웃을 위해 봉사(奉仕)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면서 

"절약(節約)하고 또 절약(節約)해서 불우(不遇)한 이웃을 도우라."는 말도 잊지 않을 만큼, 그의 경로사상(敬老思想)은 이 마을의 자랑스러운 지표(指標)가 되고 있다. 

그리고 박여사(朴女史)의 향토애(鄕土愛) 또한 대단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흙처럼 정직(正直)한 것은 없습니다. 병든 땅에서 농사(農事)가 잘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농민(農民), 일하지 않는 농민(農民), 그리고 협동(協同)을 외면(外面)하는 농민(農民)에게는 행운(幸運)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마을의 발전(發展)과 번영(繁榮)은 우리 손과 우리 힘으로 이룩해야 합니다. 내 고장을 죽음으로 지킨다는 자세(姿勢)로 가꿔 나갑시다." 

박여사(朴女史)는 이와 같은 내용(內容)의 말로 이웃들을 깨우쳐 가면서 남달리 구슬땀을 흘리면서 마을을 가꿔 나갔다. 새마을 가꾸기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해 온 박여사(朴女史)는, 열심히 땀 흘려 일하다가 실신(失神)해서 사경(死境)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간혹 그의 자녀(子女)들이 공동(共同)으로 작업(作業)을 하는 일에 너무 무리(無理)를 하지 말라고 충고(忠告)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박여사(朴女史)는, 

"무슨 일이든지 내가 먼저 앞장서서 한다는 정신자세(精神姿勢), 바로 이것이 행복(幸福)과 번영(繁榮)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는 대답(對答)으로 자식(子息)들의 입을 봉(封)해 버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