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정승하(鄭承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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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문경군 호계면
효자(孝子) 정승하(鄭承夏) 45세

200여평(餘坪)의 남의 농토(農土)를 목숨처럼 지키면서 살아온 정승하씨(鄭承夏氏)는, 위로 90 고령(高齡)의 노모(老母), 그리고 아래로는 자녀(子女) 4명(名)을 거느리고 쪼들리는 가난과 더불어 살아왔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채석장(採石場)을 찾아서 매일같이 막 노동(勞動)도 하고 있지만, 좀처럼해서 가난은 씻겨지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가난은 그런 대로 참을 수도 있었지만, 90 고령(高齡)의 노모(老母)를 보다 평안(平安)하게 봉양(奉養)못하는 것이 더 가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1982년(年)이었다. 

그의 노모(老母)가 다리를 다쳐 병석(病席)에 눕게 됐는데, 거의 매일같이 정씨(鄭氏)가 노모(老母)를 업고 다니면서 치료(治療)해 드렸다. 

15리(里) 남짓의 읍내(邑內) 한의원(漢醫院)까지 버스 편을 이용(利用)할 때도 있었지만, 침을 맞고 돌아오는 밤길은 꼬박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귀가(歸家)해야만 했기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씨(鄭氏)는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도 없이 노모(老母)를 업고 다니면서 치료(治療)하였다. 

마침 그 때가 추운 겨울이어서, 그의 고통(苦痛)은 더욱 가중(加重)됐지만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면서 노모(老母)님을 업고 다녔다. 

비단 통원치료(通院治療)뿐만 아니라 밤에는 더욱 극진히 구환(救患)했다. 

곁에 지켜 앉아서 뜨거운 물수건으로 찜질을 꼬박 밤새워 하기도 했고, 또 노모(老母)가 깊은 밤인데도 잠들지 못하고 있을 때는, 나름대로 주워들은 고담(古談)을 구수하게 엮어서 들려 주기도 하였다. 

비록 정씨(鄭氏)는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못 가본 무학(無學)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어깨너머로 들어온 유교(儒敎)에서 각별(恪別)히 부르짖는 효(孝)의 정신(精神)만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효심(孝心)도 남달리 뜨거운 수밖에 없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나라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칭송(稱頌)을 받아 왔다. 이는 곧 우리 민족(民族)이 예로부터 개인생활(個人生活)에서나 가정생활(家庭生活), 사회생활(社會生活) 그리고 국가생활(國家生活)에서 인격(人格)과 예절(禮節)을 바탕으로 한 민족고유(民族固有)의 전통적(傳統的)인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가졌던 것을 의미(意味)한다. 

그런데 시대(時代)가 달라지고 사회(社會)가 발전(發展)함에 따라 점차 사회도의(社會道議)가 땅에 떨어지고 경노사상(敬老思想)도 점점 쇠퇴(衰頹)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생활(生活) 주변(周邊)에는 정씨(鄭氏)와 같은 갸륵한 효심(孝心)을 지니고 웃어른들에게 효성(孝誠)을 다 바치고 있는 자랑스러운 효자(孝子), 효녀(孝女)들이 허다(許多)하게 있기에, 우리의 앞날은 찬란한 태양(太陽)처럼 밝기만 한 것이다. 

"어머님, 더도 말고 200세(歲)까지 장수기록(長壽記錄)을 깨어 보십시오."하고 말하는 정씨(鄭氏)야말로,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자랑스러운 효자(孝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