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순희(李順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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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상주읍
효부(孝婦) 이순희(李順姬) 37세

이순희(李順姬) 여사(女史)는 19세(歲) 때 결혼(結婚)하였는데, 그 당시(當時) 남편(男便)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고, 시댁(媤宅)에는 90 고령(高齡)의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이 그를 맞아 주었다. 

땅 한 평(坪) 없는 가난한 살림에다 시조모(媤祖母)님은, 노령(老齡)으로 망령기(妄靈氣)까지 부리는 바람에 이여사(李女史)는 신혼초(新婚初)부터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로부터 3년후(年後)인 어느 날, 시부(媤父)님이 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醉)해 마을 앞 개울에 추락(墜落)하는 불상사(不祥事)가 발생(發生)했다.

이로 말미암아 머리에 큰 상처(傷處)를 입었었는데, 그 날부터 날품팔이도 할 수 없게 되어 생활(生活)은 더욱 어려운 경지(境地)로 빠져 들어갔다. 

이여사(李女史)의 극진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간병(看病) 3년후(年後)에 시부(媤父)님은 타계(他界)하였고, 자식(子息)을 잃은 충격(衝擊)으로 시조모(媤祖母)님의 망령(妄靈)은 광란(狂亂)에 가까울 정도로 더해만 갔다. 

때로는 방(房) 안에다 대소변(大小便)을 멋대로 보는가 하면, 김치독에다 흙을 퍼 넣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옷을 모두 벗어 버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등 망령(妄靈)의 꼬리는 끝도 없었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는 조금도 짜증을 내지 않고 언제나 미소(微笑)띤 얼굴로 망령기(妄靈氣)를 잠재우곤 했다. 

끝내 시조모(媤祖母)님도 시부(媤父)님 별세후(別世後) 3년(年)만에 세상(世上)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도 2남(男) 3녀(女)의 자식(子息)이 생겨 대가족(大家族)을 이루게 됐지만, 생활(生活)은 날이 갈수록 비참(悲慘)하다못해 처참(悽慘)할 정도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매일(每日)같이 술타령으로 세월(歲月)을 보내고 있는 남편(男便)으로 인(因)해, 모든 식구(食口)가 앉아서 굶어야 할 그런 딱한 처지(處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생각다 못한 이여사(李女史)는 하는 수 없이 다음 날부터 품팔이와 행상(行商)을 하면서 근근 어려운 생활(生活)을 이어나갔지만, 술로 말미암아 몸이 허약(虛弱)해진 남편(男便)은 있으나 마나한 폐인(廢人)으로 생계(生計)에는 아무런 보탬도 주지 못하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홀로 남은 70 고령(高齡)의 시모(媤母)님마저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자, 이여사(李女史)는 남편(男便) 뒷바라지와 더불어 시모(媤母)님 구환(救患)을 위해서 온갖 정성(精誠)을 기울여 극진히 봉양(奉養)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양말 행상(行商)을 하면서 자식(子息)들을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각기 진학(進學)시켰다. 

오늘도 산(山)을 넘고 강(江)을 건너 행상(行商)길에 나선 이여사(李女史)는, 그가 시집온 직후(直後)부터 현재(現在)까지 단 한 시도 편히 쉬는 일 없이, 근(近) 20여년간(餘年間)을 줄곧 병(病)구완과 웃어른들 봉양(奉養)에만 일관(一貫)해 올 만큼 이여사(李女史)가 걸어온 그의 일생(一生)은, 눈물과 한숨의 슬픈 역정(歷程)이었다 해도 과언(過言)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