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김숙자(金淑子)

페이지 정보

본문

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선산군 도개면
효부(孝婦) 김숙자(金淑子) 42세

29세(歲)의 젊은 나이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김숙자(金淑子) 여사(女史)는, 딸 넷을 데리고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면서 살아야만 했던 운명(運命)의 여인(女人)이었다. 

"마땅한 곳이 있으면 딸 넷을 데리고 재가(再嫁)하는 일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주변(周邊)의 권유(勸誘)도 있었지만 김여사(金女史)는 그럴 때마다 "그런 마음은 꿈에도 가져 본 일이 없다."고 하면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물리친 후(後) 지금껏 20년(年) 동안을 하루같이 시부모(媤父母)님을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하면서 살아왔다. 

그 동안 그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 그것일 만큼 많은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넘어야만 했다. 

가장 고됐던 일은 3,000여평(餘坪)에 달(達)하는 농사(農事)일이었는데, 서툰 농사(農事)로 흉작(凶作)을 자초(自招)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런 해에는 품팔이와 홀치기 등으로 일곱 식구(食口)의 생계(生計)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것뿐이면 또 참을 수 있었지만, 시부(媤父)님의 중풍(中風)이 그의 고달픈 마음을 더욱 괴롭혔다. 

매일(每日)같이 용변처리(用便處理)도 해야 했고, 반찬에도 남달리 신경(神經)을 써야 했다. 

천성적(天性的)으로 마음이 온순(溫順)한 김여사(金女史)는, 농사(農事)일보다 시부(媤父)님 구환(救患)에 더 치중(置重)할 정도로 남이나 낮이나 꼬박 지켜 앉아서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낮에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시간(時間)이 틈틈이 집으로 뛰어와, 시부(媤父)님께 점심(點心)과 간식(間食)을 드리고, 그리고 나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정말 놀랍기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박이 쏟아졌다. 그 날도 김여사(金女史)는 시부(媤父)님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시부(媤父)는 "예 아가야, 우박이 쏟아진다, 참외와 토마토가 더 망가지기 전에 빨리 논밭으로 나가 보아라"라고 말하자 김여사(金女史)는 "참외와 토마토보다 아버님의 건강(健康)이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끝내 소정시간(所定時間)이 다 될 때까지 시원하게 팔다리를 주물러 드린 후에야 비로소 논밭으로 뛰어갈 만큼 그의 효성(孝誠)은 지극(至極)했다. 

시부모(媤父母)님을 정성(精誠)껏 봉양(奉養)하면서 또 한편으로 4명(名)의 딸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온 김여사(金女史)는 남달리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정열(情熱)을 쏟았다. 

이제 맏딸은 고등학교(高等學校)를 거쳐 취업중(就業中)이고 그 밑으로 고등학교(高等學校), 국민학교(國民學校)의 순(順)으로 그가 흘린 땀의 보람은 기쁨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효부(孝婦)이면서 장(壯)한 어머니이기도 한 그 녀(女)는, 항상 자녀(子女)들에게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상지덕(五常之德)인 오륜(五倫)의 가르침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임자(嚴慈)한 어머니이기도 하였다. 

"효(孝)와 예(禮)를 지키는 정숙(貞淑)한 여자(女子)가 되라." 바로 이 말도 김여사(金女史)가 딸들에게 일러 주는 거룩한 가훈(家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