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김진순(金鎭旭)

페이지 정보

본문

제26회(1983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석보면
효자(孝子) 김진순(金鎭旭) 13세

이제 겨우 13세(歲)에 불과(不過)한 어린 나이에, 효도(孝道)도 하고 연간(年間) 2~3백만(百萬)원의 농외소득(農外所得)도 올리고 있는 효심(孝心)깊은 학생(學生)이 있으니 그가 곧 김진순군(金鎭旭君)이다. 

김군(金君)의 아버지가 10여년 전(餘年前) 탄광에서 광부(鑛夫)로 작업 중(作業 中)이었는데, 고혈압(高血壓)으로 노동(勞動)을 할 수 없어 현재(現在) 거주지(居住地)로 이사온 후, 얼마 안 되는 퇴직금(退職金)마저 치료비(治療費)로 써 버리고 더 이상(以上) 치료(治療)조차 받을 길이 없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나 김군(金君)은 어머니와 더불어 개간지(開墾地)의 농토(農土)를 가꾸면서 틈틈이 남들이 좋다 하는 약(藥)을 구(求)하여 정성(精誠) 들여 구료(救療)하였으나, 간병(看病)의 보람도 없이 중풍증세(中風症勢)는 더욱 악화(惡化)되어 갔다. 

천마(天麻)라는 약(藥)이 중풍(中風)에 특효(特效)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근당(斤當) 10만(萬)원을 호가(呼價)하는 천마(天麻)는 그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 김군(金君)은 방과후(放課後) 산중(山中)을 헤매면서 천마(天麻)를 찾기 시작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도 있듯이 드디어 7일(日)만에 천마(天麻)를 찾아냈고 김군(金君)이 캐 온 천마(天麻)를 복용(服用)한 그의 부친(父親)은 마침내 3~4개월(個月)이 지나면서 약효(藥效)가 나타나므로 계속 복용(服用)시켰더니,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차도(差度)를 보여 차츰 잃어버렸던 건강(健康)을 되찾고 있다. 

김군(金君)은 그 때부터 천마(天麻)를 밭에 재배(栽培)하기로 마음먹고 마을 어른들의 자문(諮問)과 자신(自身)이 캔 천마(天麻)가 고목(枯木)에 번식(繁殖)되고 있었던 것을 참고(參考)로, 1978년(年) 어머니의 힘을 빌어 재배(栽培)하기 시작했다. 

천마(天魔)는 생육(生育)이 좋아 3년(年)만에 30kg을 수확(收穫)하는데 성공(成功)했고, 약제(藥劑)로 쓰고 남은 천마(天麻)를 팔아 300만(萬)원의 소득(所得)을 올림으로써 꿩 먹고 알 먹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지금에 와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중풍(中風)은 완치단계(完治段階)에 있으며, 산(山)에서 나무를 해 올 만큼 건강(健康)도 좋아졌다. 

김군(金君)의 부친(父親)은 지금도 소주(燒酒)에다 천마(天麻)를 넣어 술을 담근 후 약(約) 8개월(個月)이 지나면 먹고 하는데 겨울엔 추위도 모를 정도(程度)로 약효(藥效)가 좋다고 한다. 

김군(金君)은 2남(男) 3녀 중(女中) 장남(長男)으로, 위로 누나 셋은 직장(職場)과 학업관계(學業關係)로 대구(大邱)와 부산(釜山) 등지(等地)에 가 있고, 어머니와 함께 4천여평(天餘坪)의 화전(火田)을 가꾸면서 고랭지(高冷地) 채소재배(菜蔬栽培)를 하는 등, 한 때는 가장(家長) 노릇까지 하면서 부모(父母)를 돕고 있다는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칭찬(稱讚)이었다. 

"김군(金君)은 나이 어린 소년(少年)이 아니라 장년(壯年)보다 훌륭한 어른이다. 가정(家庭)에서도 효자(孝子)로 이름났지만 마을에서는 더 알려졌다. 어린 고사리 손으로 연간(年間) 300여만(餘萬)원의 농외소득(農外所得)을 올렸으니 얼마나 장(壯)한 일인가!" 

동민(洞民) 한 사람은 이와 같이 김군(金君)을 칭찬(稱讚)하면서, 동민(洞民)의 이름으로 우렁찬 박수(拍手)를 보낸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김군(金君)이 천마재배(天麻栽培)에 성공(成功)했다는 소식(消息)에, 이 마을 17개(個) 가구(家口)가 올해부터 천마재배(天麻栽培)를 시작함으로써 이 마을은 이제 높은 소득(所得)을 올리는 꿈에 부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