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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學校)에서는 모범학생(模範學生)으로, 그리고 가정(家庭)에서는 효자(孝子)로 또한 마을에서는 성실(誠實)하고 책임감(責任感)이 강(强)한 소년(少年)으로 칭찬이 자자한 정창섭군(鄭暢燮君)은, 어릴 때부터 '똘똘이'라는 별명(別名)이 붙을 만큼 그의 행실(行實)하나하나가 만점(滿點)이었다.
더욱이 정군(鄭君)은 국민학교(國民學校) 때부터 17세(歲)에 이른 지금까지, 학교(學校)에서 돌아오면 평소 건강(健康)이 좋지 않은 부친(父親)을 대신(代身)하여 3,000평(坪)의 전답(田畓)을 마치 어른들이 일하듯이 열심히 가꾸는 한편, 남은 시간(時間)도 송두리째 가사(家事)를 위해 바쳐 왔다.
그러던 중, 1980년(年) 12월(月) 어느 추운 겨울 밤, 부친(父親)이 지병(持病)으로 신음(呻吟)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길로 단숨에 20여리(余里)가 넘는 읍내(邑內) 병원(病院)을 향해 달려가다가 고갯길에서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정군(鄭君)은 손과 다리를 다쳐 피투성이가 된 채 의사(醫師)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 때 팔다리 상처(傷處)부터 치료(治療)하고 나서 왕진(往診)을 가겠다는 의사(醫師)말에, "선생(先生)님, 저의 상처(傷處)보다는 아버지가 더 급(急)합니다. 빨리 저와 함께 가 주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대답하는 정군(鄭君)의 말에 감동(感動)되어, 의사(醫師)도 하는 수 없이 치료(治療)도 못한 채 정군(鄭君)을 따라 나섰다는 것이다.
낮에는 공부(工夫)하는 학생(學生)으로, 그리고 밤에는 가장(家長)의 구실을 대신(代身)하면서, 부친(父親)의 병환(病患)을 극진히 보살펴 온 보람으로, 이제 와서는 건강(健康)을 되찾고 동정화위원장(同淨化委員長)으로 활약(活躍)할 만큼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기도 했다.
평소에 웃어른을 존경(尊敬)해야 한다는 부친(父親)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온 정군(鄭君)은, 40여(餘名)의 학생(學生)들을 설득(說得)하여 폐휴지(廢休紙)와 빈 병 수집운동(蒐集運動)을 전개(展開)하여, 여기서 생긴 돈으로 장기판을 비롯한 바둑판 등 각종 오락기구(娛樂器具)를 구입(購入)하여 경로당(敬老堂)에 기증(寄贈)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웃어른을 보면 무조건(無條件)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습성(習性)도 앞앞이 심어 주면서 예의범절(禮儀凡節)의 참뜻을 일깨워 주는 등, 경로사상(敬老思想)을 실천(實踐)을 통(通)하여 손수 수범(垂範)하고 있다.
또한 매주(每週) 토요일(土曜日)과 일요일(日曜日)에는 독서회원(讀書會員)과 더불어 마을 대청소(大淸掃), 자연보호(自然保護), 원농작업(援農作業)을 어김없이 실시(實施)하여 바쁜 농촌(農村)의 일손을 덜어 주고 있는데 이를 본 마을의 어느 주민(住民)은 "정군(鄭君)은 마을의 등불이다. 내 고장을 사랑하는 애향심(愛鄕心)이 얼마나 두터운지 어른인 우리들도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정군(鄭君)의 선행(善行)을 찬양했다.
밤에는 동회관(洞會館)에서 독서회원(讀書會員)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심히 진리탐구(眞理探究)에 전념(專念)하면서, 보다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일을 의논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건전(健全)한 풍조(風潮)의 여파(餘波)로 이 곳 청소년(靑少年)들은 모두가 모범소년(模範少年), 모범학생(模範學生)이라고 불릴 만큼 하나같이 바른 길을 걷고 있다.
슈바이처를 가장 존경(尊敬)한다는 정군(鄭君), 그는 오늘도 학교(學校)가 끝나기가 바쁘게 집으로 뛰어와 그가 해야 할 오늘의 효행(孝行)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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