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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末端) 공무원(公務員)의 아내인 윤부희(尹扶姬) 여사(女史)는, 가정(家庭)에서 장(壯)한 어머니와 효부(孝婦)로서, 그리고 동네에서는 근면성실(勤勉誠實)한 모범반장(模範班長)으로 그에 대한 칭송(稱頌)이 자자했다.
지난 1978년(年)부터 반장직(班長職)을 맡아 온 윤여사(尹女史)는, 남달리 이웃 돕기와 조기청소(早起淸掃)에 헌신(獻身)해 왔는데, 특히 그는 반상회(班常會)때마다 새마을 운동(運動)을 적극적(積極的)으로 홍보(弘報)하는 숨은 일꾼이기도 했다.
"우리도 이제 남보다 더 잘살아야겠다는 의욕(意慾)을 얻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自信)을 갖게 됐으며 '하면 된다'는 신념(信念)도 갖게 됐습니다. 이러한 의욕(意慾)과 자신(自信)으로 새마을 운동(運動)에 참여(參與)해야만 하겠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현명(賢明)한 민족(民族)에게는 실의(失意)가 있을 수 없고, 사명(使命)을 깨닫는 세대(世代)에게는 좌절(挫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협심(合心)하여 우리 반(班)을 1등(等) 새마을 반(班)으로 만들어 봅시다!"
이와 같이 열변(熱辯)을 토(吐)하는 윤여사(尹女史)는 누가 보아도 마을을 위해 태어난 일꾼만 같았다.
그는 새마을 운동(運動)중에서도 새 마음 갖기 운동(運動)에 남다른 관심(關)을 쏟으면서, 이웃에 경사(慶事)나 흉사(凶事)가 있을 때는 그가 먼저 발벗고 나서서 일할 만큼 부지런히 뛰면서 일했다.
윤여사(尹女史)는 비단 반(班)과 마을을 위하는 일뿐만 아니라, 가정(家庭)에서도 충실(忠實)한 아내로, 그리고 갸륵한 효부(孝婦)로서 그의 사명(使命)을 아낌없이 다해 왔다.
특히 68세(歲)인 시모(媤母)님이 지난 7년(年) 동안 지병(持病)인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누워 있을 때 기동(起動)을 못하게 되자,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정성(精誠)들여 구환(救患)했는데, 그의 지극(至極)한 효행(孝行)은 마침내 1982년(年) 5월(月) 대한노인회(大韓老人會) 경주시지회장(慶州市支會長)으로부터 효부상(孝婦賞)을 받을 만큼 윤여사(尹女史)의 행실(行實)은 갸륵하기만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82년(年) 7월(月) 남편(男便)이 교통사고(交通事故)를 당하여 입원(入院)하게 됨에 따라, 윤여사(尹女史)는 한편으로 시부(媤父)님을 돌보면서 또 한편으로 남편(男便)의 간병(看病)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따뜻한 정성(精誠)을 고루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4명(名)의 자녀(子女)를 위해서 어머니 구실을 다해 온 그는, 항상 엄격(嚴格)하면서도 자애(慈愛)로운 마음으로 이들이 훌륭하게 성장(成長)할 수 있도록 지도(指導)를 하고 있다.
특(特)히 그 녀(女)는 자녀(子女)들에게 항상 '1일(日) 1선(善)'을 실천(實踐)하는 사람이 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선(善)함은 남모르게 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또한 선(善)한 것이 세상(世上)에 알려졌을 때는 기뻐하기보다 먼저 부끄러워하여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타이른 탓일까? 자녀(子女) 모두가 알게 모르게 선행(善行)을 생활화(生活化)하여, 오늘에 와서는 선행가족(善行家族)이라는 칭찬(稱讚)을 들을 만큼, 학교(學校)에서나 동리(洞里)에서나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程度)이다.
오늘도 윤여사(尹女史)는, 새벽같이 비를 들고 마을 앞길로 뛰어나가는 자랑스러운 "새마을일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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