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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歲)의 가정주부(家庭主婦)이면서 여가장(女家長)이기도 한 이옥이(李玉伊) 여사(女史)에게, 12년전(年前)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후 부터 눈물겨운 고난(苦難)이 그를 뒤따라 다녔다.
이제 그는 4명(名)의 자녀(子女)와 85세(歲)의 시부(媤父)님, 그리고 72세(歲)의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역경(逆境)의 나날을 인내(忍耐)로써 극복(克服)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인고(忍苦)의 나날들을 살펴보면, 1972년(年) 2월(月)에 시부(媤父)님이 중환(重患)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년(年)을 하루같이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온갖 정성(精誠)을 다해 시봉(侍奉)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시부(媤父)님 병(病)에 좋다는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눈만 뜨면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정보(情報)를 얻은 다음, 다시 깊은 산골짝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케 오는 등 그의 정성(精誠)은 놀랍기만 했다.
오죽했으면 동네 아낙네들이 "시부(媤父)님 구환(救煥)도 좋지만, 저렇게 밤낮없이 산(山) 속을 헤매다 며느리가 지쳐서 먼저 죽을라" 이 한 마디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여사(李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시부(媤父)님 구환(救患)의 일념(一念)뿐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不拘)하고, 간혹 병상(病床)에 누워 있는 시부(媤父)님과 시모(媤母)님은 이러쿵저러쿵 하시면서 불만(不滿)을 털어 놓았지만 이여사(李女史)는 참고 또 참으면서 말없이 순종(順從)했다.
더우기 이여사(李女史)는 그와 같은 괴로움이 닥칠 때마다 어릴 때 친정(親庭)아버지가 말씀하신 "사내(思耐)라는 게 있느리라. 그 첫째는 냉혹(冷酷)한 인생(人生)을 참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괴로움을 참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째는 번거로움을 참으라는 것이고, 네째는 한가로움을 견디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일컬어 사내(四耐)라고 하는데, 네가 이 다음에 커서 시집을 가게 되면 명심(銘心)해서 이것을 지켜야 하느니라." 하는 가훈(家訓)을 되새겨 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살았다.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 남의 집 빨래와 청소 등, 손에 닥치는 대로 막노동(勞動)을 하면서도 자녀교육(子女敎育)에는 남다른 관심을 쏟아 현재(現在) 맏아들은 국민학교(國民學校)를 졸업(卒業)한 후(後) 가사(家事)를 돌보고 있고, 둘째는 고등학교(高等學校) 1학년(學年)에 그리고 세째는 중학교(中學校)에 재학(在學)하면서 열심히 공부(工夫)하고 있다.
그녀(女)는 비록 오늘날까지도 남의 집 문간방(門間房)에서 생활(生活)하여 정직(正直)하고 성실(誠實)하게 살면서 노환(老患)의 시부모(媤父母)님을 공경(恭敬)하며 정성(精誠)을 다하여 봉양(奉養)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子女敎育)을 위해서도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다.
노시부모(老媤父母)님의 뒷바라지를 한결같이 해 온 그의 뜨거운 효심(孝心)에, 이제 그 시부모(媤父母)님도 감격(感激)한 나머지 "이 세상(世上)에서 우리 며느리가 최고(最高)야!"하는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고 있을 만큼, 이여사(李女史)의 효성(孝誠)은 넓고 깊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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