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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6세(勢)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 어려운 생활(生活)을 해오던 박창웅씨(朴昌雄氏)는, 끝내 그의 어머니마저 자기(自己)를 버리고 어디론가 가 버린 고아(孤兒)아닌 고아(孤兒)의 설움 속에서 소년시절(少年時節)을 눈물로 보냈다.
하루아침에 천애(天涯)의 고아(孤兒)가 돼 버린 박씨(朴氏)는, 어린 나이에 열차(列車) 안을 누비며 껌팔이 행상(行商)도 했고, 때로는 중국요리(中國料理)집의 배달원(配達員)으로 일하면서 외로운 슬픔을 달래기도 하였다.
어느덧 그도 성장(成長)해서 어엿한 사회인(社會人)이 되었고,, 생활(生活)의 여유(餘裕)도 좀 생겨 결혼(結婚)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릴 때 자기(自己)를 버리고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어 버린 생모(生母)가 더욱 그리워졌다.
"어머니는 비록 가난 때문에 나를 버리고 어딘가 가버렸지만, 미우나 고우나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니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꼭 찾아야 한다."
어머니를 찾기 위한 박씨(朴氏)의 집념(執念)은 대단하였다.
생업(生業) 틈틈이 시간나는 대로 어머니를 찾는 일이 그의 하루 일과(日課)일 만큼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생모(生母)의 그림자를 찾아 헤맨 끝에, 1968년(年)에 드디어 개가(改嫁)하여 두 딸을 데리고 남의 집 식모(食母)살이를 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를 찾아냈다.
과거(過去)의 죄책감(罪責感) 때문에 말도 못하는 어머니를 얼싸안고 그는,
"어머니, 제가 모실 테니 제와 함께 삽시다."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그 길로 이복(異腹)동생 두 명(名)도 함께 집으로 데리고 와 그날부터 어머니를 극진(極盡)히 모셨다.
뿐만 아니라 이복(異腹) 여동생들의 결혼(結婚)과 또한 결혼 후(結婚後)의 생활(生活)도 영위(營爲)할 수 있도록, 가게와 상품(商品)도 마련해 주는 등 친(親)동생 이상으로 돌보아 주었다.
배다른 동생들이 저마다 시집가는 날, 오죽 고마웠으면 예식장(禮式場)에서 부끄러움도 없이 큰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뜨렸으랴. 천성적(天性的)으로 자비심(慈悲心)이 많은 박씨(朴氏)는, 비단 생모(生母)에게뿐만 아니라 동네 노인(老人)들에 대(對)해서도 그의 효심(孝心)을 아낌없이 나눠 주고 있는데, 예(例)를 들면 길 잃은 노인(老人)이라도 만나면, 식사(食事) 대접(待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비(旅費)까지 손에 쥐어 주기도 했고, 또한 마을 노인(老人)들을 경로당(敬老堂)으로 초청(招請)하여 주연(酒宴)을 베풀기도 하는 등 그의 지극한 경애사상(敬愛思想)은 탄복(歎服)할 정도였다.
그 자신(自身)이 어린 시절(時節)을 불우(不遇)하게 성장(成長)해 온 탓으로 남달리 인정(人情)이 많은 박씨(朴氏)는, 수시로 고아원(孤兒院)을 찾아가서 사랑을 나눠 주기도 했다.
지금은 대신(大新)1동(洞) 6통(統)의 정화위원장(淨化委員長)으로 있으면서 사회정화(社會淨化)와 방범생활(防犯生活)에도 최선(最善)을 다하고 있는 박씨(朴氏)는, "이세상(世上)에서 변(變)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버이 사랑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오늘도 따뜻한 효성(孝誠)을 어머니에게 듬뿍 안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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