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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순(朴点順) 여사(女史)는 비록 학교(學校) 문전(門前)에도 못 가본 무학(無學)이긴 했지만, 결혼(結婚)하기 전(前)에 친정부친(親庭父親)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엄훈(嚴訓)만은 잊지 않고 항상(恒常) 머리 속에 새기면서 살아왔다. 입버릇처럼 말씀 했던 엄훈(嚴訓)은 이러하였다.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고 사랑하는 자녀(子女)가 당연(當然)히 부모(父母)의 건강(健康)을 염려(念慮)하며, 의식주(衣食住)에 있어 가능(可能)한(限) 평안(平安)히 모시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을 효(孝)라고 할 수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重要)한 것은 부모(父母)의 마음을 항상 평안(平安)하게 해 드리고자 노력(努力)하는 마음 인 것이다. 이는 하나의 작은 예(例)에 불과(不過)하겠지만, 아무리 좋은 집에 산다 해도 자손(子孫)들이 서로 반목(反目)하고 출가(出嫁)한 자손(子孫)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평불만(不平不滿)을 전(傳)해 올 때 부모(父母)의 마음은 아프고 괴로울 것이며, 비록 좀 어려운 생활(生活)을 한다 해도 자손(子孫)들이 서로 화목(和睦)하고 행복(幸福)하게 살며, 서로가 힘을 모아 정성(精誠)으로 모시고자 하는 성의(誠意)가 보일 때 부모(父母)의 마음은 항상(恒常) 기쁜 것이다. 훗날 네가 출가(出嫁)해도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도록 해라."
박여사(朴女史)는 친정(親庭)아버지의 그 때의 그 엄훈(嚴訓)을 항상 머리 속에 새기면서, 지금껏 40여년간(餘年間)을 하루같이 시모(媤母)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해 온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로서, 그 동안 남편(男便)도 6.25때 전사(戰死)했고, 시(媤)동생도 전장(戰場)에서 제물(祭物)로 산화(散華)하는 등 파란곡절(波瀾曲折)도 참으로 많았다.
졸지(猝地)에 아들 둘을 잃어버린 그의 시모(媤母)님은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할 정도로 눈물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으나, 박여사(朴女史)의 따뜻한 위로(慰勞)와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다시 활기(活氣)를 되찾게 되고, 며느리인 박여사(朴女史)와 더불어 그런 대로 행복(幸福)을 누리면서 하루 하루를 지내왔다.
그런데 그 후(後) 둘째 동서(同壻)가 개가(改嫁)하는 바람에, 조카들도 그가 떠맡게 됨으로써 박여사(朴女史)의 고난(苦難)은 새롭게 싹이 트게 되었다.
그렇쟎아도 지금껏 시(媤)동생들을 친자식(親子息)처럼 돌보아 온 그는, 새로운 고역(苦役)이 가중(加重)됐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불평(不平)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고민(苦悶)이 싹트게 됐다는 것은 '자녀(子女)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자랑스러운 걱정을 의미(意味)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박여사(朴女史)는 낮에는 들판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길쌈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에게는 극진한 효성(孝誠)을, 그리고 시(媤)동생들과 질녀(姪女)들에 대(對)해선 뜨거운 사랑으로 포옹(抱擁)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지금껏 40년(年) 동안을 오직 시댁(媤宅)의 안녕(安寧)과 화목(和睦)만을 위해 몸바쳐 온 박여사(朴女史)는, 그가 시집오기 전(前) 친정(親庭)아버지가 말씀하신 엄훈(嚴訓)을 어김없이 그대로 지켜 온 효부(孝婦)로서,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그를 가리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별명(別名)을 붙일 만큼, 박여사(朴女史)의 깊은 효성(孝誠)과 열행(烈行)에 뜨거운 박수(拍手)를 보내면서 감동(感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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