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김정자(金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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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포항시 죽도동
열부(烈婦) 김정자(金貞子) 37세

집 한 간 없이 천막생활(天幕生活)을 하면서 불구(不具)의 남편(男便)을 정성(精誠)들여 섬기고, 아울러 세 자녀(子女)도 키워가고 있는 갸륵한 주부(主婦)가 있으니 그가 곧 김정자(金貞子)여사(女史)이다. 

그의 남편(男便)인 조병근씨(曺炳根氏)는 지난 1970년(年) 8월(月)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로 왼쪽 다리가 골절(骨折)되어, 그 동안 10여년(餘年)에 걸쳐 병원(病院)을 드나들면서 치료(治療)를 해 보았지만, 결과(結果)는 불구(不具)로서 끝나고 가산(家産)만 탕진(蕩盡)하는 비극(悲劇)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남편(男便)은 생활무능자(生活無能者)로 전락(轉落)했고, 아울러 쫓기기만 했던 가난은 더욱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됐다. 

김여사(金女史)의 비참(悲慘)한 생활(生活)을 눈여겨 본 친지(親知)들은, 차라리 재가(再嫁)하여 새 삶을 찾아보라는 뜻도 비쳤지만, 그런 충고(忠告)나 유혹(誘惑)이 들어 올 때마다 그는 "남편(男便)이 눈을 뜨고 살아있는데 재혼(再婚)을 하다니? 설혹 남편(男便)이 죽었다고 해도 그럴 순 없다."고 단호(斷乎)하게 반대(反對)의 실의(失意)를 밝히곤 하였다. 

남편(男便) 대신(代身) 여가장(家長) 노릇을 해야 하는 김여사(金女史)는, 조그마한 천막(天幕)을 쳐놓고 여기서 다섯 식구(食口)가 기거(起去)하면서 국수와 술 등을 팔기 시작했다. 

그의 큰 아들도 학교(學校)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사리손을 부벼가며 신문배달(新聞配達)에 나서는 등 온 가족(家族)이 한 마음이 되어, 어려운 가계(家計)를 합심렵력(合心協力)해서 끌고 나갔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여건(餘件)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김여사(金女史)는, 단 한번도 얼굴을 찡그리는 일 없이 불구(不具)의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받들며 살아왔다. 

간혹 남편(男便)이 바깥바람을 쐬기 위해서 나갔다가 쓰러졌다는 소식(消息)이라도 들려오면, 국수나 술을 팔다가도 급(急)히 현장(現場)으로 달려가 남편(男便)을 업고 들어오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들 부부(夫婦)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고 한다. 

비단 이들 부부(夫婦)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본 천막(天幕) 안의 손님들도 눈시울을 적실 만큼 김여사(金女史)의 지극(至極)한 사랑은 온 마을의 화제(話題)가 되었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至極)했던지 머리도 감겨 주고 발도 씻겨 주는 정성(精誠) 하나만 보아도, 그의 거룩한 인간애(人間愛)를 한 눈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꼬박 방(房)안에 누워 세월(歲月)을 보내야 하는 남편(男便)이 너무나도 불쌍해, 김여사(金女史)는 때때로 그를 업거나 또는 부축을 해서 가까운 곳으로 산책(散策)을 시켜 준다고 한다.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한결같이, 

"비록 그들은 천막(天幕)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잉꼬부부(夫婦) 뺨칠 정도로 정(情)답다. 특히 남편(男便)을 섬기는 김여사(金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하늘도 감탄(感歎)할 정도이다."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의 칭송(稱頌)의 말 그대로, 김여사(金女史)는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열행자(烈行者)였고, 사랑과 봉사(奉仕)의 참 실천자(實踐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