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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희(朱蓮姬) 여사(女史)의 결혼(結婚)은 너무나 불행(不幸)하게 맺어졌다.
가난으로 인하여 친정(親庭)에서 밀려나다시피 그가 18세(歲) 되던 해 부모(父母)의 권유(勸誘)로 장두희씨(張斗熙氏)와 결혼(結婚)하였는데, 아무리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남편(男便)이긴 했지만 첫날밤을 지내면서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새 날을 맞이했다.
"무슨 남자(男子)가 이렇게 수줍어할까? 백년가약(百年佳約)을 했으면 하다못해 이름 석 자(字)라도 물어 봐야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여자(女子)인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도 없고..."
그러한 그의 의아심(疑訝心)은 마침내 풀렸다.
그의 남편(男便)은 벙어리였던 것이다.
순간 주여사(朱女史)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絶望感)에 빠지면서, 수재매녀격(受財賣女格)으로 출가(出嫁)시킨 친정부모(親庭父母)를 한(限)없이 원망(怨望)하였다.
그런데 남편(男便)이 벙어리였을 뿐만 아니라 시모(媤母)님도 한 분이 아닌 두 분이었으며, 공교롭게도 두 시모(媤母)님 또한 벙어리들이었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막힌 날벼락이 또 어디 있으랴, 거기다 또 생활(生活)에 무관심(無關心)한 칠순(七旬)의 시부(媤父)님까지 있고 보면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결혼(結婚) 3일후(日後) 친정(親庭)에 돌아온 주여사(朱女史)는, 친정부모(親庭父母)님께 인사(人事)를 올린 뒤 자결(自決)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재빨리 그 눈치를 알아챈 친정부모(親庭父母)들의 호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여자(女子)는 적인종부(適人從夫)가 되면, 일부종사(一夫從事)로써 일생(一生)을 바쳐야 하느니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의 윤리(倫理)를 저버리고 가문(家門)을 욕되게 하는 행동(行動)은 삼가도록 하여라. 알아들었느냐?"라는 엄훈(嚴訓)뿐이었다.
주여사(朱女史)는 하는 수 없이 이를 깨물면서 그 길로 시가(媤家)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때 그는 다시 굳은 결심(決心)을 했다.
'모든 것은 운명(運命)이다. 신(神)의 계시(啓示)로 생각하고 남편(男便)과 웃어른들을 극진(極盡)히 모시자.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사랑과 봉사(奉仕)그것뿐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굳게 가다듬은 주여사(朱女史)는, 그날부터 입가에 애써 미소(微笑)를 그리면서까지 열심(熱心)히 가사(家事)를 돌보며 웃어른들을 정성(精誠)들여 공경(恭敬)했다.
주여사(朱女史)가 시집온 후(後) 2년(年)만에 시부(媤父)님께서 득병(得病)하여 몸져 눕게 되자 극진(極盡)한 간호(看護)와 효성(孝誠)으로 구환(救患)을 했지만, 끝내 건강(健康)을 회복(回復)하지 못하고 타계(他界)하고 말았는데, 주여사(朱女史)는 그 충격(衝擊)으로 실신(失神)하는 소동(騷動)을 벌일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지극(至極)하였다.
이제 그 녀(女)는 불구(不具)의 두 시모(媤母)님과 역시(亦是) 벙어리인 남편(男便)을 위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참뜻을 행동(行動)으로 옮기고 있으며 슬하(膝下)의 3남(男) 2녀(女)의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정열(情熱)을 기울이며 가정(家庭)을 알차게 가꿔 나가고 있다.
"주여사(朱女史)의 피땀 어린 노력(努力)으로 벙어리 가족(家族)이 화목(和睦)의 꽃을 피우는 가정(家庭)으로 변모(變貌)하였다."
이 한마디는 인근동민(隣近洞民)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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