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강정자(姜貞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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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1984년 4월 18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상주군 뇌동면
효부(孝婦) 강정자(姜貞子) 22세

도회지(都會地)를 동경(憧憬)하면서 사치(奢侈)한 꿈을 안고 농촌(農村)을 빠져나가는 여성(女性)들이 많지만 강정자(姜貞子) 여인(女人)은 예외(例外)였다. 

'농촌(農村)의 복흥(復興)과 발전(發展)은 우리 농촌(農村) 젊은이들이 땀 흘려 이룩해야 한다. 농부(農夫)가 농토(農土)를 외면(外面)하게 되면 우리네 농촌(農村)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강효부(姜孝婦)는 처녀(處女)때의 신념(信念)대로 농부(農夫)와 결혼(結婚)하여 이상향(理想鄕)의 꿈을 키워 갔다. 

그러던 중,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이 불자유(不自由)스럽게 되어 이 때부터 그의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가 뒤따랐다.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쳐 용변처리(用便處理)도 깨끗이 했고, 목욕(沐浴)은 물론이지만 옷도 하루가 멀다할 정도(程度)로 갈아 입혔다. 

또한 어려운 가계(家計)를 돕기 위해서 품팔이와 삯바느질로 밤을 새우기도 했는데, 특(特)히 시모(媤母)님이 좋아하는 식사(食事)를 마련하는 데 세심(細心)한 신경(神經)을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강효부(姜孝婦)는 시모(媤母)님의 병세(病勢)를 꺽어 보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시모(媤母)님께 물리운동(物理運動)을 끈덕지게 권유(勸誘)하였다. 

예(例)를 들면 그가 손을 잡고 시모(媤母)님을 걷게 한다든가, 또는 손수 수저를 들고 밥을 들도록 손놀림을 시켜 보는 등 여러 가지 물리운동(物理運動)을 시켜 보았지만, 병세(病勢)는 제자리에서 단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모(媤母)님은 모든 것을 체념(諦念)한 듯 이렇게 말을 했다.  

"틀렸다. 틀렸어, 내 병(病)은 내가 죽어야 나을 병(病)이지 인력(人力)이나 인술(仁術)로 되는 게 아니야."하시면서 절망(絶望)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강효부(姜孝婦)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어머님,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도 있듯이 불가능(不可能)이란 없습니다. 실망(失望)하지 마시고 끝까지 싸워서 이겨 봅시다. 제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강효부(姜孝婦)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다시 또 걸음마를 시키는 등 물리운동(物理運動)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 실시(實施)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침내 발병(發病) 3년 후(年後)부터 병세(病勢)가 차츰 호전(好轉)되어 지금에 와서는 조금씩 기동(起動)도 하게 됐다. 

그 순간(瞬間) 시모(媤母)님은 강효부(姜孝婦)를 부둥켜안고 감격(感激)의 눈물을 흘렀다. 

"아가야, 네 덕분(德分)으로 내가 다시 사람 구실을 하게 됐다. 정말 고맙다. 아가야!" 

강효부(姜孝婦)는 비단 시모(媤母)님께만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대(對)한 것이 아니라, 마을 노인(老人)모두에게 시(媤)어른을 보살피듯 공경(恭敬)해 왔다. 

자녀(子女)들에게도 장차(將次) '조상(祖上)에게 감사(感謝)하는 마음', '부모(父母)의 은혜(恩惠)를 생각하고 효도(孝道)하는 마음', '웃어른을 존경(尊敬)하는 마음' 이 세 가지의 예도(禮度)를 깊이 심어 주고 싶다는 강효부(姜孝婦)는, 가훈(家訓)인 효(孝)와 예(禮)의 두 글자를 길이길이 후손(後孫)에게 이어주고 싶다고 했다.